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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현대인을 위한 신학

첫번째 주제: 신앙과 운명

by 최수근 2018. 1. 8.

. 신학이 필요한 것인가?

신학= (theos)+(logos)

사전적으로는 신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이라는 의미

인간이 신을 인식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진술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의 역할

1. 신학은 성경의 내용을 일관되게 보도록 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성경은 다양한 성격과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 안에는 역사적인 기록, 문학적인 표현, 종교적인 고백, 수사학적인 진술 등이 혼재 되어 있다. 내용적으로도 어떤 부분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게 보이는 곳도 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서로 조화롭고 일관성 있게 볼 수 있는 눈을 신학이 제공한다. 신학을 통해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면 성경에 대한 이해가 모자이크식이 되기가 쉽다. 신학은 성경을 포괄적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성경의 다양한 주제들을 조화 있게 엮도록 해준다

2. 신학을 통해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다.

많은 교인들이 설교를 듣고 신앙적으로 살기 위해 결단을 한다. 또 말씀을 통해 감동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면 어떻게 신앙적으로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 돌아오면, 각 기독교인은 혼자 세상에 던져진다. 기독교인은 신앙이지만 동시에 사회인이다. 신앙과 세상에서의 삶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신앙과 삶의 분리와 괴리를 해결하지 않으면 신앙을 활기를 잃게 된다. 신학은 신앙과 삶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신앙과 삶의 이원화가 극복되면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된다.

3.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나아갈 지평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기준을 마련해 주는 종교가 아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보여주고, 궁극적으로 이 역사의 완성이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 지평을 알 때, 기독교인은 이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설정할 수 있다. 신학은 성경이 제시하는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역사 위에 자신의 삶을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준다. 신학을 통해 성경에 흩어져 기록된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적 지평을 조직적으로 이해하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찾게 됩니다.

기독교인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신학을 해야 한다. 사실은 모든 기독교인이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신학자는 자신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삶에서 신앙적인 의미를 찾는 사람이 신학자이다. 아무리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어도 신앙과 삶의 괴리 속에 있는 사람은 신학자가 아니다.

 

. 첫 번째 주제: 신앙과 운명

운명론은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기독교인 중에도 은연중 운명론을 받아들인다. 운명론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사건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생각을 지칭한다. 과연 운명론이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있을까?

1. 결정론

운명론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결정론이 전제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사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미래에 나타날 행위에 대해 점을 치거나 어떤 특정한 날짜가 길하거나 흉하다고 말하는 것은 미래가 결정되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반면에 미래가 고정되지 않고 열려 있다면 미래를 말하는 역술은 토대 자체를 상실한다.

기독교 신앙은 결정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더욱이 운명론이나 결정론에 이라는 용어는 없지만 인간의 삶과 역사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결정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우상 숭배적 측면을 갖는다.

2. 예언과 예정

기독교 신앙은 운명론이나 결정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왜 많은 기독교인이 운명론이나 결정론에 빠지는 것일까? 우리는 한국의 문화에 운명론적인 요소가 많다. 그런데 문화적 요소 외에도, 신앙을 결정론적으로 만드는 이유가 있다. 가장 주된 이유는 기독교 사상 중에서 예언예정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교인들은 예언을 결정론적으로 생각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결정해 둔 미래를 미리 예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개신교의 중요한 교리 중에 예정론이 있다. 이 예정론을 결정론으로 생각해서 혼돈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1) 예언은 하나님의 맡겨진 말씀이다.

예언은 미리 알게 된 말씀이라는 뜻보다는 하나님의 맡겨진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무엇보다도 예언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지 미래라는 시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미래와 연관 된 경우 미래의 일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예전에 행했던 하나님의 일을 상기 시킬 때는 예언이 과거와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을 반드시 미래를 말하는 행위로 고정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하나님의 미래를 고정해서 하나님의 행위를 제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성경의 예언을 미래가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결정론과 유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성경의 예언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으로 전하는 행위라면, 결정론의 예언은 무신론적이고 기계적으로 고정된 미래를 지시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자는 미래의 길흉을 말하는 복술자나 점쟁이가 아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섭리해 나갈지를 알리는 자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의 역할은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2) 교인들 중에 예정론을 결정론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예정론을 결정론적인 관점에서 보다보니, 하나님을 살아 있는 인격으로 보지 않고 고정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심한 경우 세상이 멸망할 때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까지 정해져 있으며 그 숫자는 불변하다고 이해한다. 예정론을 미래가 결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정론을 기계적인 결정론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미 결정된 역사 속에서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그냥 구경한 하는 하나님이 된다. 예정론을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가 정해져 있다는 식의 결정론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하나님은 무시무시하고 일방적이며 독단적인 신이 된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은총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예정론에서 불변하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확고하며 불변하다는 의미이다. 예정론은 그의 주권에 대한 강조,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교리이다.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열려 있다. 하나님은 고정된 기계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잘못을 보시고 진노해서 심판하려다가도 인간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용서해 주시는 예가 무수히 나온다(9:25-26, 왕하 20:1-11 ). 신자가에게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 앞에 잘못을 범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도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계약을 맺으신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현재적이며, 하나님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신다.

구원의 숫자까지 미리 정해져 있고 미래는 불변하다는 주장은 오해스러운 말이다. 이런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역사 속으로 들어오고,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을 죽었다. 모든 것이 기계처럼 결정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성육신을 할 이유가 없다. 성경의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응답하신다. 살아 있는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체험한다.

따라서 신앙인에게 정해진 운명은 없다. 신앙이라면 살아 있는 하나님에게 매달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요, 미래의 주인이다.

. 살아계신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 속에서 우리와 대화하고 그의 뜻을 행하셨다.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행위와 그의 섭리를 기록한 책이다. 성경에는 중요한 주제들이 있다. 이러한 주요 주제들은 모두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연관이 있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지으셨는지에 대한 주제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만이 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마지막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주제는 종말론이다. 종말론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주와 역사를 완성할 지에 대한 교리이다.

창조와 종말 사이를 연결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역사가 된다. 우리는 창조와 종말 사이를 살고 있다. 하나님이 현재의 역사를 인도해서 역사의 완성까지 다스리는 것에 대한 주제는 섭리론이다. 섭리론의 근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해서 그냥 버려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피조세계와 끊임없이 관계하면서 이 역사의 완성까지 인도하신다고 증언한다.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말이다.

성경은 언제나 살아있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형태의 결정론과도 양립할 수 없다. 결정론이 옳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된다. 응답하지 못하는 신은 중세에 대두되었던 시계공의 하나님이 된다. 결정론 속에서 하나님은 역사에 대입할 여지가 없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 또한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가 시간의 주인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과거와 현재의 주인이며, 또한 미래의 주인입니다. 그가 과거와 현재를 다스렸듯이 다가오는 미래도 다스리십니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신앙은 살아있는 것이다. 산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과 교제한다. 살아 있는 하나님과 교제 속에 있을 때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된다. 신앙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신앙은 얼마의 성경 지식이나 교리를 외우고 암송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는 것이다. 신자의 앞날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미래도 고정된 것은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현재 살아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와 대화하고 이 역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분이다. 운명론을 받아 들이는 것은 그런 하나님을 죽은 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바로 어떤 종류의 운명론이나 결정론도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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