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기독교자료/현대인을 위한 신학

세번째 주제: 죄와 율법

by 최수근 2018. 1. 15.

 

[세번째 주제: 죄와 율법]

교회에서 많이 쓰는 용어 중에 죄인이라는 말이 있다. 기독교인 중에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에 대한 개념은 교인들마다 차이가 있고 모호한 경우가 많다. “당신은 왜 죄인입니까?” 물으면 당황하며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런데 실상은 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죄의 상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개념에 따라 신앙의 상태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떠남

구약에서의 죄는 율법 준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죄인은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율법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 죄인을 구별했다. 그래서 세리, 창기, 이방인이 죄인들로 지칭되었다. 바리새인들의 기준에 따르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나 죄인이 되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하고 지키는 기준이 되는 할라카’(halakah)라는 구체적인 율례를 가지고 있었다. 할라카는 613개의 율례인데 248개의 계명과 365개의 금령으로 이루어졌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해석할 때 할라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할라카의 각 조항을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하게 준수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라카에 따라 율법을 해석하지 않았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율법을 해석했다. 이로 인해 안식일법, 정결예법, 성전에 대한 태도, 금식 같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립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비난한 것은 저들이 율법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이렇듯 율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죄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가져온다.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셨고,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지켜야 되는 율례로 보았기에 예수님에게 죄는 하나님의 뜻을 떠난 것이고, 바리새인에게는 율례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정리를 하면 성경에서의 죄는 형식적인 율법의 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넓은 의미에서 죄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가리키고,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이다.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는 하마르티아이다. ‘하마르티아의 문자적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벗어난 경우, 혹은 목표를 벗어난 실수를 말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가 죄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정당한 관계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삶과 목적과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된다. 자신의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산다. 삶의 목적도, 의미도 상실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이 바로 과녁을 벗어난 인간의 삶이고, 목표를 상실한 인간의 삶이다. 이처럼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삶의 목표와 의미를 벗어난 상태를 죄라고 보았다. 이렇듯 죄의 상태는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윤리적인 얼마의 조항을 잘 지켰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은 죄의 상태에 있는 자이다.

 

율법화의 위험

율법이 경직되고 굳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상실하면 인간에게 무거운 굴레가 된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고 착각을 했다. 규례만 잘 지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생각에서 하나님의 뜻을 율법이라는 얼마의 규례로 환원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뜻은 얼마의 규례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 규례를 마음대로 해석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규례를 잘 지켰는지 감독도 한다.

이처럼 얼마의 규례를 기준으로 죄를 정하거나, 혹은 윤리적으로만 규정하면 율법화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교회에서 강조하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를 지켰느냐 여부를 죄의 기준으로 삼으면 율법화가 일어난다. 율법화가 일어나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뜻이 굳어져 경직된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석화되어 규정화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의 규례와 윤리적 범주를 정해 놓고, 이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지켰다고 하는 바리새인의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화 되면 신앙은 활력을 잃는다. 하나님의 뜻이 윤리화되면 죄책감만 양산된다.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으면, 그것은 율법이 된다. 이를 행하면 거룩한 자가 되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 된다. 이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화에 빠지게 되고, 이제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근본적인 차원을 떠나 인간이 지켜야만 하는 율례가 된다.

 

자기의 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율법화는 심각한 결과로 연결된다. 하나님의 뜻을 얼마의 율법으로 만들면, 하나님이 이 율법에 갇힌다. 그러면 율법을 지킬 경우 나는 하나님의 뜻을 지켰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주체는 나라는 인간이 된다. 여기서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신의 의가 드러난다. 이것이 바리새인이 자신도 모르게 빠졌던 함정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나는 거룩하다는 착각이다. ‘나는 주일성수를 했다는 의식, ‘나는 헌금을 충분하게 했다는 의식은 위험하다. 주일성수를 하고 헌금을 한 주체가 바로 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의식은 나는 의롭다는 바리새인의 의에 빠지게 한다. 바리새인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신의 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바리새인의 거짓된 의에 빠지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런 인간은 바로 이중의 죄에 빠진다. 하나님을 율법에 가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긴 죄이다. 이런 사람에게 는 자기 성취로 다가온다. 의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

구원은 먼저 소극적 개념으로는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넒은 의미에서 구원은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않는 것이다. 이는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감이다.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알게 될 때 진정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자기가 주인인줄 알고 살아간다. 인간이 인간인바 가지는 근원적인 한계가 죄이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교만이 죄이다. 이제 자아라는 잘못된 자신에게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을 떠나, 삶의 목표와 의미를 상실하며 사는 것을 죄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생각할 때,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무런 대답 없는 침묵의 하나님을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인내하며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언젠가 더 이상 자신을 향한 삶의 의미를 묻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죄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이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에 창기와 세리는 가장 대표적인 죄인이었다. 인간적으로도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 까지 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삶에서 새롭게 의미를 찾았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자들이었지만 자신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귀하게 여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의 목표가 의미를 정한다는 것을 세상적인 성취와 연결해서 이해하면 안 된다.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산다면 아주 작은 일에 동참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사회적 성취를 해도 자기의 세계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죄인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삶을 정향하는 자이다.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과 의미는 어떤 성취를 하는지에 달려 있지 않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하는지에 달려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