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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의 실체: 엡 2장 1-3절]

by 최수근 2018. 7. 24.

2018년 7월 22일 주일설교동영상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의 실체: 엡 2장 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생명교회 최수근 목사

지난 주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나는 복 있는 자요, 택함 받은 자요, 아들, 딸이요 하나님의 기업이요, 성령의 보증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바라보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에 대한 평가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1-3절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진단을 명확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구속받지 못한 인간에 대해 세 가지 섬뜩한 진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들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1절에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의 현재 상태에 대한 진술입니다.

허물과 죄가 도대체 어떤 파워를 갖고 있기에 사람들을 죽게 한 걸까요?

허물이란 뜻에 헬라어 파랍토마는 곁으로 비켜나다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잘못된 발걸음으로 인해 정해진 경계선을 넘어가거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죄란 뜻에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 과녁을 놓치거나, 표준에 미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이런 단어의 의미들로 볼 때 하나님이 정한 기준을 넘어섰거나, 그 길에서 어긋난 것이 허물이요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별선을 넘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인간의 욕망을 죄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소외되었고,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로마서 623절에서 죄의 결과를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물론 그리스도 밖에 있어 구원받지 못하고 여전히 죄와 허물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라는 말은 문젯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고백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들, 죄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죽기는커녕 여전히 우리 주변을 활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기도 엄청 잘 삽니다. 하지만 이것은 육체적인 생명에 불과합니다. 이런 말을 사람들이 종종 합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 대해 에베소서 418절에서는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보니 당연히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눈이 멀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가 먹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에 하나님께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죄에 대해선 신속하게 반응하고 죄를 먹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삶이 거칠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이토록 세상에 죄가 창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고, 죄에 대해선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 없는 삶은, 그 사람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깨어 있다고 해도, 세상을 아무리 잘 살아도,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선 죽었다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기 전에 우리가 처해 있던 첫 번째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들 안에 이 땅을 개선시켜갈 만한 어떤 힘도, 더욱이 구원에 이를 만한 어떤 자격도,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 가운데 있어요.

둘째, 구원받기 이전 우리는 예외없이 세상과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본래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따르도록 창조된 인간들이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하여 영적 죽음 가운데 빠져있을 때, 인간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세상 풍조를 따랐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을 따랐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풍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기준과 가치를 말합니다. 세상에 만연해 있는 물질 중심의 사고와 인본주의적인 사고,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기초한 기준과 가치들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와 허물로 죽은 이들의 삶은 새롭게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악한 세대와 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경우들을 경험할 때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 시대와 이 세상의 사악한 가치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탄을 말합니다. 2절 하반 절에서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악과 오류, 폭력은 사탄에게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시 하는 세상 사람들 속에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한 사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사탄은 위협이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긴장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렇듯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영향력이 사람들의 삶을 주관하고 다스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불순종하고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따른 결과는 이 땅에서 도덕적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의 욕심을 따랐다고 했는데, 육체는 타락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연스러운 육체적인 욕구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식욕이 폭음이나 폭식으로, 수면욕이 나태함으로, 성욕이 육욕으로 바뀔 때에는 이 자연적 욕구들이 죄성을 지닌 욕구로 왜곡됩니다.

다른 하나는 육체의 욕심에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의 잘못된 욕구, 즉 지적교만, 잘못된 야심, 진리에 대한 부정, 악의 나 복수심으로 가득 찬 생각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거기에 지배당함으로써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졌습니다. 죄가 사람들의 전 인격을 지배하여 마음속 깊은 곳까지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두운 세력과 그 세력에서 파생된 왜곡된 가치와 시각의 힘에 갇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로 인해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정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심판받게 받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절에서는 육체의 일들과 그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 밖에 있는 인간들의 실존입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낙관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병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인 치유책만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세상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세상 밖으로부터 오는 근본적인 치료책이 필요합니다.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인간을 보면 절망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단번에 살리셨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구속의 과정을 위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인간들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적인 죽음에 이르렀던 우리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그 어느 누구도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상황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그대로 우리를 방치해두신다면 우리의 끝은 영원한 죽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이미 우리를 예정하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구원 역사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과거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를 향하신 복음의 사건으로 전환됩니다. 실은 구원의 사건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한다는 점에서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기적을 맛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소식을 접하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어둠의 자리를 기웃거리고, 그곳으로 향하여 걸아가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옛 사람의 모습을 우리가 끊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볼 때,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려고 하는 신앙의 결단 없이 처음 은혜로 구원 받은 단계, 내게 모든 기준을 맞추어주시던 초보신앙의 단계에서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믿음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할지를 결단하고, 세례의 과정을 통해 자기를 내려놓고 그리스도로 살아가고자 하는 거룩함의 결단과 헌신과 희생이 실행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이 세상에선 누릴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소망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말입니다.

바울은 과거 옛 사람의 모습을 과감히 벗어버릴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난 우리들의 모든 허물을 벗어버릴 수 있기 바랍니다.

더 이상 자신을 죄와 허물 가운데 방치한 채로 자신을 기만하면서 살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모든 죄로 인한 억압의 사슬을 끊어주시고 우리를 이미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66-7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리는 거룩한 생명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거룩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있는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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