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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신학과 목회를 한국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by 최수근 2012. 6. 29.

[칼빈의 신학과 목회]

-  한국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Ⅰ. 서론

     칼빈 탄생 500주년이 되었다. 그는 영혼의 목자로서, 제도적으로 개혁교회를 정착시키려 노력한 지도자로서, 그리고 설교자로서, 끊임없이 저술 작업과 수업을 통해 교리를 가르치던 신학자로서, 교육자로서, 그리고 한 가정으로 아버지이자. 형제들의 보호자로서, 구제에 앞장선 자선사업가이자. 기독교 공동체 건설의 이상을 지닌 한 인간으로 살았다. 그런 칼빈의 신학과 목회 실천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우리의 현재와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역사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한국교회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단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한국교회가 정작 칼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한국교회가 칼빈의 신학과 목회를 적용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지는 여전히 우리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 칼빈이 지난 500년 전 고민했던 목회의 현장에서 어떤 신학적 사고를 가지고 사역을 했는지, 그의 신학과 목회를 살펴보고 오늘 우리 한국교회 현장에서, 특별히 한국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적용해볼 수 있는 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한국교회의 상황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루었던 한국개신교회는 근자에 들어 교회의 불투명한 재정사용, 일부 목회자들의 높은 권위의식과 지나친 부, 무분별한 전도행위 또는 공격적 선교정책과 비전략적 실천, 종교 갈등의 원인제공, 사회참여 및 기여부족 등의 이유들로 매우 비판받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안티 기독교인들이 많이 늘어나 인터넷 상에서의 공격도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칼빈주의란 이름만 받아들였을 뿐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 의미에서 칼빈주의와 거리가 멀다. 즉 칼빈주의라는 형식만 가지기 원했을 따름이며 진정한 칼빈주의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대다수 한국교회는 칼빈을 거의 모르고 있고, 칼빈주의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Ⅲ. 칼빈의 신학과 한국교회

  1. 보편 섭리와 특별 섭리

     칼빈은 철학자들처럼 보편 섭리를 인정하나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대한 칼빈의 기본적 통찰력은 그의 섭리론과 예정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섭리란 땅위에서 진행되는 것을 하늘에서 하나님이 게으른 모습으로 관찰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특별 섭리에 관한 토의에서 칼빈은 또한 일반 은총과 보편적 섭리는 다르다. 칼빈이 생각하길, 어떤 것도 우연에 의하여 생기지 않고 모든 것이 그의 계획으로부터 나와서 모든 것을 그의 목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편 섭리의 교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을 수 없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은 주실 뿐만 아니라 각 개인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주실 때만이 온전히 설명되어 진다고 주장한다. 이 신앙의 확실성은 인간 정신의 주도 면밀성에서 예정은 인간의 능력으로 시험받을 수 없다. 성령의 은총으로만이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을 얻어지는 것이다. 신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섭리와 예정 교리에 기초가 된다.

  2. 예정론

     종교개혁 이후 예정론은 주로 칼빈과 그의 사상적 전통에 서 있는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 특징적으로 지지되고 주장되어 왔다. 칼빈에게 있어서 예정론은 전능하신 섭리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관심에 대한 그의 기본적 확신이 섭리론과 예정론 모두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칼빈이 보편적 섭리와 특별섭리, 그리고 총체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을 다루지만, 그의 입장은 철학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돌보심과 특수성에 있다. 칼빈의 예정이란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개인에게 이루어지도록 결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두 종착점 가운데 어느 쪽으로 창조되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은 살도록 예정되었다던가 아니면 죽기로 예정되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의 예정론, 성경 주석의 예정론, 신조에 나타난 예정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공통된 결론에 이를 줄 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구원할 자와 유기할 자를 자위에 의하여 예정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예정한 것도 아니며, 타락 전 즉 창세전에 예정하셨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으며, 예정한 자는 끝까지 보전하셔서 확실히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칼빈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성경 안에 계시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는 그 가르침은 마땅한 겸손을 가지고 설명한다. 어떤 사상을 다루듯 예정은 연구할 수 없다. 인간은 예정에 관한 호기심에 가득 찬 질문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선택에 관하여 사색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도와주며, 인간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겸손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를 결심한 자들을 선택하신, 멸망시키기로 결심한 자들도 거절하신다고 성경을 가르친다.

  3. 성서론

     칼빈의 철저하게 성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이는 성서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영원까지 전파,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인식한 칼빈의 계시론을 함축하고 있는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자연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의식에는 도달할 수 없으나, 순수하고 참된 종교성,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경외감을 지향할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성서와 더불어 피조 세계가 갖는 계시의 2차적 가능성이며, 자연신학의 목적이기도 하다. 자연신학은 ‘창조’와 ‘구속’, 이 두 가지의 신 인식 가운데에서 전자만을 그것도 희미하게 통찰할 수밖에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성을 증언하는 특별 계시인 성서를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식과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의 원천이 되는 성서, 곧 특별 계시와 인간 본성의 관계도 인간의 본성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서의 계시가 여전히 비의로 남게 되며, 계시가 허락된 자에게만 현실적인 진리로 이해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비의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진리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자체 내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전환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성서의 유일한 해석자인 성령의 고유한 영역인 것이다.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 성서는 하나님에게 신뢰를 둘 것과 경건한 삶을 지향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예언의 목적이며 동시에 복음의 핵심이기에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4. 성경관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원하고 침범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지지하기 위해서 성경이 신적으로 영감 된 것을 선언한다. 칼빈은 부언하고 있다. “성경의 조명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게 되나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초월하여서만 성경이 하나님 자신의 입으로부터 직접 받아 인간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음을 완전히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성화와 율법과의 관계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롭게 된다는 것이 성화의 열매인 선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제시하고자 했다. 여기서 율법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 없다는 ‘무율법주의’적 사고를 배격하고, 율법으로 의를 획득한다는 ‘율법주의’도 배격한다고 했다. 다만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생활의 규범’으로서 제시했다. 칼빈에 있어서의 구원과 성화에서는 복음의 핵심이 회개와 죄 사함으로서 이들이 신앙으로부터 나오고, 칭의와 성화의 근거와 이유라고 했다.

  5. 칼빈의 대속교리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서부터 그의 대속 교리를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노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셨다. 칼빈의 사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묶여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계시이다. 죄인들을 위한 그의 죽음 속에서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을 성취하셨다.

  6. 칼빈의 주권 사상

     그에 의하면 “주권사상”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을 “영원, 영원부터 그 자신의 지혜로 그가 하시고자 하는 바로 실향하시는 만물의 중재자이시오 통치자이시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선한 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에게도 적용되며, 인간과 천사들의 거룩한 행동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죄악 된 행동들에게까지도 적용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훈적으로 명한 것을 작정 적으로 결의하시고 그가 교훈적으로 명한 것을 작정 적으로 금하시는 것을 우리는 반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원의 신앙과 경외를 요구하면서 가장 예리하게 바로 문제에 초점을 모은다.

  7. 한국장로교회의 칼빈신학사상의 이해의 대립과 분열

     한국 장로교회사는 크게 보면 예정론과 성서론, 교회론을 이해하는 입장의 대립과 분열로 점철되어 있다. 예정론에 속하는 거룩성 문제를 놓고 고백적 분리주의가 태동되었고, 신앙과 구원의 표준인 성서에 대한 권위와 해석의 문제로 인하여 개혁적 진보주의가 분립되었으며,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포괄한 교회론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근본적 교리주의와 본문적 환원주의가 갈라지게 되었다. 한국 장로교회 분열사 속에서 쟁점이 되었던 칼빈의 신학사상에 대한 논점들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 칼빈의 예정론 논쟁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처음으로 초래하였던 교회재건운동과 이 운동의 역사적인 배경이 되었던 신사참배의 사건은 ‘교회의 거룩성’의 문제를 놓고 전개되었던 신학적 갈등과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교회사 속에서 교회의 거룩성 문제는 교회론에서 대부분 다루어지고 있다. 교회의 거룩성은 구원의 척도가 되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의 문제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들은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표징에 의해서 유기된 자들과 구별된다.’ 는 칼빈의 예정론에 입각한 신학적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같은 거룩성을 선택의 원인과 결과 가운데에서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상당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원인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적 측면과 공조하는 조건적 선택이 된다. 그리고 결과로 본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공로와는 무관한 절대적인 주권에 귀속되는 사건인 것이다. 교회의 거룩성이 갖는 이 같은 양 측면이 고백적 분리주의의 분립을 가져오는 데에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기에, 칼빈의 예정론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의 거룩성을 준거로 삼아 양자를 평가할 필요성이 있다.

     교회의 거룩성과 함께 고백적 분리주의의 분열적 원인으로 작용했던 신학적 요소로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성서무오설’ 이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은 교회의 거룩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논구 할 수 있는 전제가 되고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이 사실이라면, 거룩성의 문제는 결코 원인적인 성격을 가질 수가 없다. 이는 타락과 거룩은 상반된 성질을 가지고 있고, 또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거나 구원할 자존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에 의존해야 하는 구원관이 있을 뿐이다. 성서를 절대적으로 계명으로 생각한 성서무오설은 고백적 분리주의보다는 역사적 진보주의의 분립과정에서 더욱 환히 드러나는 문제이다. 고백적 분리주의가 역설했던 우상 숭배는 성서무오설이라는 성서론이 토대가 된 주장이다.

    (2) 칼빈의 성서론 논쟁

     칼빈의 개혁적 신학을 뒷받침해 주었던 성서관과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언하는 매개체인 성서가 인간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며, 구원의 척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성서관을 극단화하여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와 아무런 전제 없이 동일화시킴으로써 ‘성서중심주의’ 로 나아가는 폐단이 한국 장로교회 내에 발생하였고, 이것으로 인한 대립과 갈등이 한국 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인 개혁적 진보주의의 태동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칼빈이 역설했던 성서관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 주장이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자연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인식이 불가능하기에 성서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둘째는 성서의 해석권을 교회가 독점할 수 없고 오히려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교회가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성서 해석의 문제는 참된 교회의 표징인 말씀의 선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 실현되어야 하는데, 교회가 성서 보다 우위에 있음으로서 그리스도의 계시성을 약화시켰다는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칼빈의 성서론이 추구한 목적은 성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담겨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와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성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대체한 모순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 장로교회 내에서 일부 보수적 노선이 내걸고 있는 성서중심주의의 논리적 근거는 성서의 ‘신적 기원’에 있다. 신적 기원이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축자영감설’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축자영감설과 전적 영감설이 ‘기계적인 축자’와 ‘성령의 완전한 영감’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성서 기자가 기록할 단어 하나까지도 영감을 받았다는 시각에서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이 같은 성서의 축자, 전적 영감설은 성서의 무오설로 발전하게 되고, 무오설은 인간의 성서 해석권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성서 해석에 대한 부정은 성서의 시대적, 상황적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는 근거, 다시 말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경청할 수 있는 신학적 기반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 같은 오류를 비판하면서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구분할 것을 강조한 개혁적 진보주의는 성서를 해석하지 않은 것은 성서를 우상화할 뿐만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조차 소멸시킨다는 주장을 하였다. 개혁적 진보주의의 주장은 성서의 무오설을 주장하는 이들과 대립을 빚게 되었고, 그 대립은 분열이라는 형태로 결론을 맺게 되었다.

    (3) 칼빈의 교회론 논쟁

     한국 장로교회의 세 번째 분열인 환원적 본문주의의 분립은 세상과 사회에 대한 교회의 ‘선교적 노선’ 과 ‘교회일치의 문제’가 배경이 되었던 사건이다. 더 구체적으로 WCC의 정책과 이를 비판하는 이를 비판하는 용공적 이데올로기가 문제가 되어 일어난 분열이었다. 교회의 선교와 교회의 일치의 문제는 교회론에 근거하여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것과 규정된 교회의 본질에 따라 교회의 실천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안이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그의 현존이 나타나는 장소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인 복음이 실현되고 또 이를 전파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이 복음의 선포는 내적으로 하나의 주를 섬기는 지체로서 교회의 통일을 꾀하고 외적으로는 복음으로 생명력이 세상을 포괄할 수 있도록 세상을 선교의 대상을 삼는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복음 증언의 사역을 배제하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적 경륜의 도구로서 부름을 받은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증언적 도구인 교회가 복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선교적 방향이 달라질 수가 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구원자로 국한하여 이해하는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수직적 관계만이 부각되고, 세상과 교회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는 무의미해 진다. 오지 교회의 순수성을 통해 자신들의 경건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다. 이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포괄적 구원자나 만인을 향한 중보자로 규정할 때에는 교회의 범주가 가시적 교회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불가시적 교회, 더 나아가 세상 전체를 교회의 가능태로 보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내적인 거룩성의 함양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회계와 하나님 통치의 실현을 촉구하는 형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 문제를 교회의 구주와 세상의 주인이 같은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강조함으로써 해결하고 있다. 교회와 세상이 하나이 주를 섬기고 있기에 그 안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칼빈의 교회론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교회 증언의 세속화를 정당화해 주는 신학적 근거가 되고 있다.

     교회 증언의 세속화와 더불어 교회론에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는 교회 일치의 문제는 칼빈의 개혁사상을 통해 다시 평가받아야 할 주제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이 결과론적으로는 교회 분열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의 분열이 그가 의도했던 일인지 그리고 교회의 분열이 그의 교회론과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NAE측은 교리상의 불일치와 제도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같은 단일 교회를 만들 수도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WCC의 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WCC가 추구하는 교회 일치의 형태는 제도적 통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같은 지체로서 상호 이해와 협력을 마련할 수 있는 유기적 일치의 관계였다. 상호 이해와 협력을 전제하기에 교리적으로 가질 수 있는 상이함도 인정되고 각 교회의 독자성과 다양성도 존중된다. 교회 일치에 대한 칼빈의 입장도 WCC의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 될 수 있다. 참 교회의 선포와 성례전이 실행되는 교회라면 주님의 교회로 받아들이고서 일치를 모색해 나갔다. 로마 카톨릭과의 결별도 참 교회의 표징이 사라졌기에 이루어진 일이지 또 다른 교회를 수립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참 교회의 표징이 나타나는 한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Ⅳ. 칼빈의 목회와 한국교회

  1. 칼빈의 목회 이해와 실천

     칼빈은 개신교가 막 태동한 격동의 세기에 이민자의 신분으로 시의회와의 갈등을 조정하며 제네바시의 종교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4중 직분과 기관들을 연결하여 말씀선포와 성례전 시행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삶의 변화, 약자보호와 복지 확대. 선교에 힘쓰는 종합적 목회를 추구하였다. 이때 칼빈은 모든 관계에서 ‘상호영역 존중’과 ‘긴밀한 협조관계’라는 두 명제의 균형을 중시하였고 이 점은 그의 목회가 성공한 이유가 되었다. 한국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로 대표되는 리더십은 이런 점에서 칼빈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 시의회가 교회의 고유한 영역(예: 권징과 회복)에 개입할 때 교회(목사회)는 단호히 맞섰지만 성만찬의 횟수를 결정하는 일에는 시의회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교회의 표지에 성도의 훈련과 권징을 포함하지 않았던 칼빈은 바른 말씀선포와 성만찬 시행이 자연스럽게 바른 삶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칼빈은 인간의 죄성으로 생겨나는 연약함, 게으름, 변덕스러움의 증상에 대해 철저하게 자각하고 그것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교회의 공예배가 구원의 삶을 깨달아 누리게 하는 교육적 수간이라면 컨시스토리와 같은 기관은 삶의 현장에서 구원이 구체화되도록 잡아주고 인도하는 외적 수단일 것이다. 이 사역을 통해 칼빈은 성도의 표지가 되는 3가지 요소들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즉 바른 신앙고백과 삶의 모범, 그리고 성만찬의 정기적 참여가 일상화될 수 있도록 컨시스토리는 심방과 상담, 법정식의 심리를 통하여 성도들을 교육하고 훈련하였다.

     그의 목회사역에서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는 이단에 대한 단호한 대처이다.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대하여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칼빈에게 그 책임을 묻고 잔혹한 결정을 내렸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의 칼빈이 처하였던 역사적 정황에 대하여 우리는 오늘날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카톨릭교회는 개혁교회를 가르쳐 이단이라고 하였으니 칼빈과 같은 개혁교회지도자들이 이단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참 교회를 세우는데 필수적인 일이었다.

     칼빈은 여러 나라의 신학자. 교회지도자. 제왕귀족들과 교류하면서 가능하면 신학적 합의를 이루고자 애썼다. 또한 복음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고 흥왕되는 일에 힘썼다. 그는 디아스포라 교회들에게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제공함으로 한 믿음에 대한 동일한 고백을 추구하였고 예전과 교회정치에 관한 지혜를 나눔으로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개혁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데 기여하고자 하였다.

  2. 칼빈의 목회 지혜로 다시 생각하는 한국교회

     한국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로 대표되는 리더십은 칼빈에게서 배울 것이 참 많다. 한국교회는 여전히 당회 안에서의 주도권싸움으로 많은 교회들이 내홍을 겪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과감한 타협정신이 부족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탓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특정 직분의 권위를 더 주장하지 말고 함께 동역하게 되어있는 장로정치의 특성을 존중하고 민주적 의사결과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결정에 순복하는 훈련이 더욱 필요하다.

     칼빈의 제네바는 빠른 속도로 다민족/문화적인 국제도시로 바꿔져 갔고 칼빈은 그 중심에서 있었다. 칼빈은 내부적으로 시의회와의 긴밀한 협조 속에 제네바가 참된 기독교정신을 실천하는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시하였고, 외부적으로 개신교가 유럽전체로 순조롭게 확장되어갈 수 있도록 자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한국교회는 칼빈의 제네바와 매우 유사한 상황에 서 있다. 교회는 내부적으로 성도들의 삶의 모범을 강화하고 분명한 신앙고백과 정례화된 교회생활을 훈련시켜야 할 것이고 외부적으로 국내전도와 사회봉사. 해외선교에서 국가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신앙으로 확실하게 훈련되었지만 다원화된 세상에서 전략적으로 자신을 낮추며 최선을 추구하는 유연성을 갖춘 크리스챤 리더들이 더 필요하다. 이러한 리더를 양성하는데 칼빈의 제네바 목회는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Ⅴ. 결론

     한국교회의 문제 특히 장로교의 문제는 장로교가 교회 정치적으로 장로직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로교일 뿐, 실제로 칼빈이 꿈꾸고 실천해 나갔던 장로교의 이상과 목회를 실현해 나가는데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대다수의 목회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면한, 교회의 “성장”이다. 그러다보니 한국교회의 관심과 장로교로서 당연히 따라야 할 원칙 사이에 커다란 괴리와 간극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칼빈의 목회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자 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사역을 통해, 물론 그 문제점들과 지금 한국교회 현장에서 동떨어진 현실들을 감안하더라도 새롭게 갱신되어져야 한다.

     종교개혁의 신학을 세운 칼빈은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시금석을 제시하여 놓았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성서해석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지혜를 얻는다. 더 나아가서 신학을 무시하고, 당장 목회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목회방법만을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던져버려야 할 껍데기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여준다. 당대 최고의 학식과 지시에 근거하여, 오직 성서로 돌아가서 현실의 문제해결을 제시하고, 교회의 역량과 지도력을 발휘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생애에서 한국교회 문제 해결과 발전 방향에 대한 수많은 시사점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진리와 비진리를 섞는 것이 마치 관용인 듯 여기는 악한 시대가 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때에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칼빈을 답습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참된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교회와 성도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말이다.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 거짓 신학과 싸우며 투쟁하는 것이 칼빈이 지향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빛을 잃어가는 한국장로교회가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 위해 위해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참된 신학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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