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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자료/현대인을 위한 신학

기독교인과 고난

by 최수근 2018. 1. 21.

『현대인을 위한 신학』

[네번째 주제: 기독교인과 고난]

많은 교인들이 고난 앞에서 이렇게 반문한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인가요?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

일상에서 만나는 고난

기독교인들도 살면서 고난을 당한다. 질병뿐만 아니라 불의 사고, 경제적 고통, 가정적인 어려움 등으로 힘들어 한다. 평생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물질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하는 교인도 있다.

기독교인이 살면서 당하는 고난과 사고는 비기독교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앙과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성경에서는 신앙이 세상적인 부귀나 고난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역사 2,000년 동안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들 중에는 힘들게 생활한 분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누구보다도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고, 사고를 당하고, 질병으로 고생했다. 바울도 참으로 여러 종류의 고난을 겪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로서 받은 고난 외에도,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을 많이 당했다.

예언자들, 사도들,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이 부족해서 삶의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다. 반면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해서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신앙이 없다고 해서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앙을 세상적인 고난이나 부귀와 직접 연관시키는 것이 무리한 일이다. 일상에서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고난은 시험으로

교인이 만난 고난은 곧잘 시험으로 연결된다. 고난을 신앙 여부와 연결시키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험은 신앙적인 혼란에 빠진다는 의미이다. 교인에게 닥친 고난은 자주 신앙적 혼란으로 발전한다. 고난이 신앙적 혼란으로 발전되는 것은 신앙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대체로 신앙에 내용이 없고, 신앙과 삶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교인들이 시험에 잘 든다. 이들은 정말 작은 것으로 시험에 빠진다. 목회자가 반갑게 인사를 안 받아줬다고 시험에 들어 교회를 안 나오고, 주차장에서 주차 문제로 시비가 있어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고, 자기만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 같다고 시험에 들어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심지어 교회에서 평소 자신이 즐겨 앉던 자리에 다른 교인이 앉아서 예배드렸다고 시험에 든다. 이렇게 시험에 잘 드는 이유는 결국 신앙이 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인들에게 신앙에 대한 열정은 강조하지만, 신앙의 내용에 대한 교육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신은 강조하지만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빈약한 것이다. 신앙적으로 살려고 결단하고 응답하는 것도 좋지만 신앙의 내용을 채워 나가지 못한다면 실제로 삶과 신앙은 연결 되지 않는다. 신앙적으로 살고 싶지만, 실제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막막한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을 듣기도 하지만 머리에만 머물고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결국 교인들의 삶과 신앙이 분리되는 경우가 흔하다. 신앙과 삶의 분리 속에서 교인들은 교회에서는 신앙적으로 처신하고, 사회에서는 사회의 규례에 따라 산다. 이런 신앙은 활력이 없다. 우리들이 갖는 이런 신앙적 취약성은 신학적 토대가 약한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신학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에 필요한 체계적인 인식을 말한다. 교인들은 자신의 삶과 신앙에 대해 누구나 어느 정도의 통전적인 인식을 해야 한다. 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앙과 삶이 분리된 이원화 속에 살다 보니, 일상에서 작은 어려움만 만나도 교인들은 바로 신앙적으로 혼란스러워 한다. 하물며 일상에서 겪는 사고, 질병, 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고난을 당하면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이런 혼란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시험에 들게 되는 것이다. 급기야는 신앙이 위축되거나, 답답한 심정으로 교회를 떠난다. 떠나지 않아도 신앙에 생긴 혼란을 해결하지 못하고 무력한 교회생활만 반복한다.

신앙은 부적이 아니다

가장 주의해야 하는 신앙관은 신앙과 이 세상의 성공 여부를 직접 연결시키는 경우이다. 즉 신앙이 이 세상에서 건강, 물질, 사회적 성취 등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 것이다. 신앙을 이렇게 이해하는 교인들은 고난을 당하면 더욱 당황한다. “신앙생활은 잘 했는데 내가 왜 이런 사고를 당하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신앙관은 신앙으로 부적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불행이 피해간다고 믿는 것과 같다. 신앙을 소유했으니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있는 방법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소유의 개념으로 인식된다.

이런 신앙관을 가진 교인들은 악인이 세상에서 잘되면 무척 혼란을 겪는다. 교회에 다니지 않고 아주 부도덕하고 포악한 사람이 성공해서 잘사는 경우가 주변에 흔히 있다. 하지만 악한 자가 잘사는 것을 보고 신앙적으로 혼란을 겪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실패가 신앙의 정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악한 세력은 우리 주변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모든 악은 극복될 것이다. 그동안은 악과 어둠이 일시적으로 득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편 37편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로 인해 불평하지 말라 하셨다. 금방 저들이 시들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은혜로 온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주어진다. 인간이 노력해서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신앙은 좌절에서 소망을 갖게 하고, 허무에서 생명을 보게 하고, 죽음에서 부활을 바라보게 한다. 신앙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넘어서며, 벅찬 감동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한다. 신앙이 이 세상의 부귀나 고난 여부에 의해 규정될 수는 없다.

고난은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에게 구별 없이 온다. 사고와 질병도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교인들 중에 고난을 당하거나, 즐거운 일을 당하는 것은 삶이 주는 일상사이다. 성경은 고난이나 즐거움이 교인 가운데 누구에게나 올 수 있기에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5:13) 물질이나 사회적인 성취도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구별이 없다. 세상에서의 고난이나 성공이 신앙과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고난 앞에서 빛난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불현 듯 올 수 있다. 신앙인이라고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고난이 피해가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도 사고를 당하고 질병에 걸린다. 여기에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고난을 당한 후 어떻게 응답하는 지에서 차이가 난다.

비신앙인은 사고나 고난을 당하면 자연인으로서 반응을 한다. 자신의 성격이나 타고난 기질을 따라 어떤 이들은 고난에 의연하게 대처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난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기도 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좌절하고, 삶을 불평한다. 허물에 빠지고 주변을 원망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잃고 자신을 저주까지 한다. 이렇게 고난에 대해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지만 이 모든 반응은 자연인으로서의 반응이다.

신앙인은 고난을 만나면 자연인으로서의 반응을 넘어, 신앙인으로 반응한다. 여기에서 차이가 난다. 신앙인 역시 인간인지라 자연인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고난을 당하면 놀라고 분노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워한다. 인격적 기질에 따라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도 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신앙인은 자신의 인간적 기질을 넘어 신앙으로 고난과 마주한다.

신앙은 구체화될 때 생명력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실패와 어려움, 고난들을 경험할 수 있다. 취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이성교제에 실패할 수도 있고,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직장에서 해고될 수도 있고, 프로젝트에 실패할 수도 있고, 재정적인 파탄이 올 수도 있다. 이 때 자연인으로서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누구나 겪는 일이다. 이에 사람들은 이겨내기도 하지만 좌절하고 삶을 염세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자신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는 경우마저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고통의 상황에서 신앙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고 소리쳐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고난이 주는 고통은 받아들이지만 그 고통으로 인해 소망을 잃지는 않는다. 신앙인도 큰 질병에 걸린다. 신앙인도 질병에 걸리면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고통으로 신음하지만 그 질병으로 인해 허무의 힘에 빠지지는 않는다. 신앙인도 물질이 없어 곤궁을 겪는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지만 그 삶이 염세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진정한 신앙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다. “악인은 그의 환란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14:32)

나아가 신앙인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본다. 신앙인도 고난이 주는 물리적 고통과 심적 고통을 겪지만,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 고난을 통해 오히려 신앙이 깊어지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바울의 이 말씀은 신앙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고난 앞에서 신앙은 진정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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