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일 주일설교원고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 성도입니까? 행 11장 19-3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2015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전체인구 19.7%, 967만 6000명이 기독교인입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 종교 란에 기독교라고 표시하는 이들이 이렇게 됩니다. 하지만 종교와 그 종교의 가치가 묻어나오는 삶이 일치하는 경우들은 적지 않습니다. 내가 종교 란에 기독교라고 표시하는 것 말고 사람들이 나를 진정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어지는 성도입니까?
그 존칭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어쩜 그것 자체를 모르고 자기감정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좀 도덕적이고 선하게 산다고 해서 참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좀 도덕적인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소위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이 결단되고 실행되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무색케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11장의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그래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물씬 나는 삶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발견한다고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과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단번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축적되고 축적되어 그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보였기에 예수를 따르는 무리라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저들은 스데반 박해 때문에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흩어져 가던 중 걱정과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작은 성공에 안주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는 순간 신앙의 정체에 빠지게 됩니다. 제자들은 흩어지자 오히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자로서 자각이 된 것입니다. 그 중에 몇 사람은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들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셨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끊임없는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부르신 목적입니다. 복의 통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통해 흘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들이 사람들에게 복음 전할 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독자적 행동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주의 손에 이끌리어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자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착하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한 믿음과 성령 충만한 자였고 협력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던 사울에게로 갑니다.
바나바가 사울 즉 바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에서 일 년 간 모여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삶의 성숙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그로인해 복음이 저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내면의 변화는 삶의 변화로 나타났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들 속에 드러난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기존의 유대교인들과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사람들은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한 예로 이들은 지체들의 어려움에 기꺼이 나눔으로 동참하였습니다. 유대만 흉년이 든 것이 아닙니다.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자신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9절에 보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절 “이를 실행하여 바나나와 사울의 손으로 장도들에게 보내니라.” 하였습니다.
어렵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각각 그 힘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첫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또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사랑 안에서 자신을 내주는 일에 깊이 헌신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왕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을 위해 다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런 삶이 축적되고 축적되어 그리스도인, 즉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라는 정체성을 세상이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먼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요즘 자기 홍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인스타그램 등등
많은 기독교인들이 SNS를 통해 교회활동과 은혜를 나눕니다. 보이는 것만을 볼 때는 대단한 크리스천입니다. 헌데 과연 보이는 것과 그 사람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그 사람을 경험할 때 자기가 내세우는 것과 일치하는 삶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일치하는 삶을 향해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이 계속 오버랩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셔야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나의 삶의 원천이 되어주실 때 그 일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컨트롤 타워를 드립시다.
예수의 이름을 소유합시다. 그리고 그 이름이 주는 권세로 살아갑시다. 복음의 증인이 됩시다. 안으로 안으로의 삶이 아니라 밖으로 축복의 통로로 삽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움켜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다 내어드립시다.
그렇게 하루하루 삶을 살다보면 우리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각인될 것입니다.
모습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장도, 우리의 마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를 통해 세상이 변화된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로마가 변화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게르만 민족이, 바이킹 족이 변화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세상의 수많은 민족이 구원의 길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제국의 힘으로요? 무력으로요? 아닙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 지는 이들이 그들 속에서 예수님의 편지가 되고, 향기가 되고, 하나님의 얼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를 기대하시는 아버지 앞에 우리가 서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이 필 수 있습니다. 권능이 임해야 합니다. 그 권능을 받고 그 삶에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으로 삽시다.
'주일예배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의: 롬 3장 21-28절 (0) | 2017.11.18 |
---|---|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선교: 행 13장 1-12절 (0) | 2017.07.21 |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롬 12장1-2절 (0) | 2016.05.15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장 1-13절 (0) | 2016.05.08 |
누구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롬 8장 28-39절 (0) | 2016.04.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