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7일 주일예배
[나병환자 나아만의 회복: 왕하 5장 1-14절]
나아만은 과거에 존귀한 자였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었고, 아람을 구원한 위대한 용사이었기에 아람 왕의 총애를 받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병 환자입니다. 1절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 환자더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주받은 존재처럼 여겨졌고, 공동체로부터 소외됐습니다. 비록 큰 용사였지만 나아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용하다는 의사가 있으면 찾아가 보고 심지어 주술사에게도 갔을 겁니다. 그러나 소용없었습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왕으로부터 주변 사람으로부터 나아만은 잊혀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초조했을까요?
우리는 나아만의 모습에서 한때는 잘 나가던 자였으나 지금은 그 영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그와 함께 회복 불능의 문제와 고난 앞에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불행한 자로 여기며 힘들어하는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주변을 보면서 남들은 모두 잘살고 있는 것 같은데, 자기 자신만이 그렇지 못하다고 그런 환경에 억울해하고 힘들어하거나, 과거 잘 나가던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답답해하곤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삶을 산다고 하지만 전혀 신앙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만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 어떤 해답도 없습니다. 스스로 빠져 들어가는 모래무덤으로부터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기회를 분명 주십니다. 그것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에게도 그런 기회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아람 군대가 전쟁 중에 이스라엘 땅에서 잡아온 어린 소녀 하나가 나아만 장군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여자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를 섬겼는데, 어느 날 그 소녀가 여주인에게 말하였습니다. 3절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의사나 유력한 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람의 고위 층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단지 전쟁 중에 종으로 잡혀온 어린 소녀입니다. 그 아이가 말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나아만의 아내는 아이의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았습니다. 바로 남편 나아만에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그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사람의 절박함이요 간절함 때문입니다. 그는 존귀한 자였고, 큰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병환자입니다. 삶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고픈 마음으로 작은 여자 아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죠. 믿음의 역사는 엄청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미세한 소리에 반응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우리 주변에 숱한 메시지가 있어도 그것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죠. 우리 삶의 회복은 그와 같은 작은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나아만의 아내와 나아만 장군의 대화는 나오지 않고, 곧 바로 나아만이 아람의 왕에게 들어가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4절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사정 이야기를 듣은 아람 왕도 나아만에게 가라고 명하였습니다. 5절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아람 왕도 나아만을 귀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잘못하면 자기도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그를 신뢰함으로 편지까지 써주며 허락했습니다. 오히려 불신앙 가운데 빠져 있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 앞과 선지자 앞에 서기를 불편해하는데, 반대로 우상을 섬기는 나라의 왕이 나아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가서 병을 고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조롱할 수 있음에도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역사는 어느 특정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함, 갈급함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은 임하셔서 회복하시고 치유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왕의 편지를 들고 지체함 없이 사마리아로 떠났습니다.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갖고 선지자에게 건넬 예물까지 들고 갑니다. 실은 인간적인 마음이기도 하지만 그는 치료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람을 떠납니다. 나아만은 자기 권력을 이용해 이스라엘에서 선지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준비된 날렵한 군사들을 보내 납치도 해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로 떠났습니다.
자기의 자리에 있는 한 은혜는 다가오지 않습니다. 떠나야 합니다. 자기의 자리, 자기가 그나마 힘을 휘두를 수 있던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질병의 아픔 속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 자리를 떠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남은 권력과 질병이라는 부끄러움 속에 묻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벗어버리기를 간절히 원하였고,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자리로 적극적으로 나아갔습니다.
문제는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6절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라는 아람 왕의 글을 받아들고 자기 옷을 찢으며 탄식하였던 겁니다. 7절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자기에게 고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하나님의 종 선지자를 통해 고쳐달라는 것인데 왕은 오해하고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것이죠. 불신앙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니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참담한 이야기를 들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요청하였습니다. 8절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 엘리사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했던 거죠. 우리 앞에 이렇게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를 가로막는 불신앙이 많습니다. 오히려 이방 사람 나아만의 모습이 더 적극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은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으로 가서 그 집 문 앞에 섰습니다. 나아만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뛰어나와 자기를 영접하고 굉장한 방법으로 문둥병을 치료해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깰 때가 많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기대를 아주 거세게 부숴버렸습니다. 10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은 멀리 아람에서 왔습니다. 왕에게로 왔다가 다시 선지자에게로 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 가라고 합니다. 그것도 요단강으로 말입니다. 그럼 엘리사도 같이 가서 거기서 치료의 행동을 정중하게 행해야 하잖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말로 다 해버렸습니다.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씻으라”
이 치료 법은 나아만 장군이 기대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11절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 우리의 방법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내려놓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기대도, 목회자에 대한 기대도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위치에 걸맞는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큰 소리 칩니다.
나아만 장군을 대하는 엘리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아만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12절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평소에 요단 강은 작은 강입니다. 결코 수려하고 넓은 강이 아니에요. 반면에 아바나와 바르발은 넓고 맑은 물이 흐르는 강입니다. 깨끗한 물이 오히려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기에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말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뭔가 굉장한 주술적 치료를 기대했던 거죠. 거룩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고, 환부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치료가 되는 그 과정을 기대했던 겁니다. 그는 그 자리를 더 이상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버텨왔는데 더는 버틸 수 없어 분노하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분노하며 떠나는 나아만 장군을 그의 종들이 가로막고 간곡히 이야기하였습니다. 13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아마도 굉장히 어려운 행동을 요청하였다면 당신께서 그렇게 하셨을 것인데, 단순히 가서 씻으라고 하니 이런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한번 해보시고 그 다음 일을 생각하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종들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엄청나게 어려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입은 자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단강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소로 나아가는 것이 거리끼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고집하는 나의 자리에 우리가 서 있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갈대아 우르와 하란이 아닌 하나님이 보여주실 땅으로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야곱에게도 세겜이 아닌 벧엘로 올라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서 있어야 할 영광과 대접받고자 하는 자리에 앉아있고자 했던 것을 봅니다. 이 영역의 경계선을 허물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치유하시는 새롭게 하시는 역사의 현장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나병환자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회복과 치유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간절함으로 나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이 자신의 체면, 자기의 자리에 대한 고집을 버리도록 하였습니다. 참으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믿음 너머 갈급함, 간절함, 갈망의 크기가 작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한 번 더 행동합니다. 14절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즉 엘리사의 명령대로 요단 강으로 갔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요단강까지는 30여킬로미터가 됩니다. 오늘날처럼 단번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긴 거리를 왔습니다. 지쳤던 그이지만 마지막으로 기대하며 그곳에 가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갔습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그가 걸치고 있던 군대장관의 복장을 입은 채로 들어갔을까요? 아마도 처음에 올 때 그는 최상의 멋진 장군의 복장으로 치장했을 것입니다. 그는 작은 요단 강가에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벗어야 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과시했던 옷을 벗는 그 자리,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알몸이 되는 그 자리가 우리에게는 은혜의 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에서 우리 자신의 마지막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여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와 온전하게 하심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령 조금의 시도를 해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청하신 숫자를 채우지 못하고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이 멈추는 것입니다.
나아만에게는 여기에서도 여러번의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몸을 담글 때마다 자신에게서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하였겠지요. 그러나 여섯 번 몸을 담글 때까지도 어떤 변화도 없었습니다. 나병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믿음의 인내란 그런 것입니다. 나의 한계가 아닌 하나님 약속하신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렇게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왔을 때 나아만 장군은 물론 수행했던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하시는 역사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과정은 점진적 열매도 있지만 단번에 이루어주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은 우리의 온전한 순종과 맞부딪쳤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회복은 오늘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놀라운 영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리로 나아가 거기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벗으라 하심에 순종하여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문둥병과 같은 불가능해보이는 모든 상황들이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우리 모든 지체들에게 나아만과 같은 갈급함과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그래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던 순종의 마음, 믿음의 인내를 주셔서 이와 같은 놀라운 회복과 치유,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올 한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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