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2일 주일예배
[복음과 현실 사이에서: 마 11장 2-6절]
처음에는 누군가를 대할 때 느낌표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물음표로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예수님은 처음에는 확실한 느낌표였습니다. “그래 바로 이 사람이야!”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로 와서 세례를 받으려 할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마 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극구 세례 베풀기를 사양하는 그에게 예수님은 마 3:15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셨습니다. 그제야 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알았던 거죠. 감히 자신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걸 말이죠.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면을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말을 합니다. 요 1:29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던 중요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고백합니다.
요 1:33-34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성령이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는 순간 그토록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바로 그분이 오셨음을 인지했던 겁니다. 그런 그의 감동스러운 고백에 그의 제자 가운데 안드레가 예수님을 쫓아갔고, 형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죠.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느낌표였을 겁니다. 바로 이 분이야, 이 분이야말로 내 인생을 변화시켜주실 분이고, 내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실 분이라고 감격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눈에 콩깍지가 하나둘 벗겨지면서 물음표로 바뀌는 경험들을 하곤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처음에는 감동 감동이었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끊임없는 어려움 때문입니다. 감동과 감격을 고난과 고통이 밀어버렸습니다.
참으로 당당했던 세례 요한에게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가 헤롯왕의 부도덕함을 비판하다가 절대권력에 밉보여 감옥에 갇히게 된 겁니다. 그의 앞날은 불투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요한이 감옥에 갇히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막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렇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면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도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이야기해주었겠지요. 이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도록 하였습니다.
마 11:3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왜 세례 요한은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긴 시간 약속대로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비범하게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 겁니다. 더군다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까지 말했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관한 이야기도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확신해 차서 말하지 못하고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라고 제자들을 통해 물어 왔을까요?
이렇게 조금은 혼란스러워하는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바로 메시아 시대에 일어나게 될 일들을 나열하고 계신 겁니다. 구약 성경에서 약속한 것들의 성취인 거죠. 그런데 지금 예수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성취한 분이시기에 바로 메시아이시다는 사실을 요한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오감으로 느껴도 온전히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마음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그건 전혀 다른 기대를 하고 있어서입니다. 요한이나 다른 유대인들에게 그려지는 메시아 상은 예수님과는 달랐던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병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으시고 이적도 베푸셨지만, 그들의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고자 하셨기에 그들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시면 악은 물러가고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가 도래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나라가 세워질 거라는 기대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혔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헤롯왕이 자기 아내로 삼았기에 그 악행을 꾸짖었는데, 악한 자는 여전히 떵떵거리고 있고 자기는 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예전의 느낌표였던 마음이 물음표로 바뀐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마 11:6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다니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되는 걸까요? 이런 경우들이 사람들에게서 생기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겁니다.
비록 5절에 언급된 극적인 기적들을 경험하지는 못할지라도 예수께서 가져오시는 나라는 분명히 놀라운 일들의 경험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루어졌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다른 현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시는 하늘의 기쁨과 성취가 예비 되어 있고 참으로 많은 이들이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이 세상에는 악으로 인해 야기 되는 일들을 끊임없이 경험해야 하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약속과는 달리 지금 처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힘들기 때문인 겁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왜 세상은 이렇게 바뀌지 않고 있습니까?” “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답답하고 어려운 상황은 계속되고 있나요?”
아마도 이와 같은 상황이 세례 요한의 마음에 파장을 일게 한 것이죠. 감금된 장소에서 오랫동안 고난을 겪을 때는, 요한처럼 모든 것에 균형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의심은 그런 토양에서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지혜롭게도 그 의심들이 곪아 터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그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 직접 문의 하려고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이런 경험에 직면할 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의 장벽, 절박한 상황의 늪을 잘 헤치고 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겠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실족할 가능성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다면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종말의 축복들을 경험하기 시작했다면, 지금 당장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아마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런 일은 예수님께서 계획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시는 구원 계획의 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이것을 오해하고 우리가 헛된 그림을 그려가다가 자기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넘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먼저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그리스도로서의 권위를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시시각각 닥쳐올 어떤 좋지 않은 상황들, 곧 고난과 죽음까지라도 감내하고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무거운 상황들이 우리를 옥죄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역설을 터득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요한 이래 마태의 교회 성도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역설의 경험을 터득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고 그분으로 인하여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만일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실족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자녀들인 우리를 위해 주고자 하는 하늘의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슬픈 일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하지만 잘들어보면 사역에 대한 칭찬이지 그런 그의 질문에 대해선 냉철한 평가를 하셨습니다.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그것은 성경의 예언대로 그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말라기 선지가가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바로 세례 요한이 바로 그라고 하신 겁니다.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그런 그가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해야 할 그가 한순간 흔들렸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요한에 대해 분명한 평가를 하십니다. 마 11:11a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여자가 낳은 이들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는 평가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 11:11b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어요. 요한의 의심과 망설임은 그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천국에는 아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왕에 관하여 확신하지 못하는 부분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의심과 망설임으로 그분 앞에 서지 않고 분명한 확신과 믿음의 고백, 진정한 마음으로 왕이신 그리스도께 헌신할 수 있다면 요한보다 훨씬 더 그분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무엇을 했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그분께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믿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어렵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의심과 망설임이 아니라 순전한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는 결코 복음과 현실 사이에서 실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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