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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복음으로 의식화하라: 마 16장 1-12절

by 최수근 2023. 7. 23.

2023년 7월 16일 주일예배

[복음으로 의식화하라: 마 16장 1-1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오늘 우리 앞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챗 GPT를 통해서도 다양한 정보에 접근합니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선별하여 받아들이고 나의 지식으로 삼아야 할지 그래서 고민이 됩니다. 우리가 AI도 아니고 결국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렇듯 많은 정보에는 불량 지식도 많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지식도 있지만, 우리를 죽이는 지식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유 선생 신뢰했다가 낭패를 당할 수 있어요. 그래서인지 지적 생활의 설계: 넘치는 정보를 내 것으로 낚아 채는 지식 탐구생활과 같은 책들이 서점에 많이 꽂혀 있습니다. 아마도 넘쳐나는 정보를 어떻게 선택할지 고민하는 분들은 이런 종류의 책에 눈길이 갈 겁니다.

지식에 대한 수용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의식화 교육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1970년대 말 야학이나 교사 운동가, 진보적 교육학자들에 의해 도입돼 사회 각층으로 확산이 되었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이론입니다. 본래 의식화란 자신이 속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자신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잘못 적용된 경우들이 꽤 있습니다. 자기들의 주장을 주입하기 위한 한 방향의 정보만 의식화 과정에서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단 같은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들의 사익을 위해 만들어진 교리를 주입해서 세뇌를 시키는 것이죠. 이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래로 계속됐습니다. 이단 혹은 거짓된 사조들이 복음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세력화를 꾀하기 위해 슬며시 들어와 교회 공동체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수없는 이들의 도전으로 가득합니다.

무엇을 공급받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너무도 많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릇된 정보들을 걸러내고 바른 신학적 지식의 수용을 통해 합리적이고 건강한, 또 편향적이지 않은 신앙을 세워가려면 성경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해가시는지의 과정과 구원의 목적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주의하고 차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곡되고 사익화된 신앙적 지식입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은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보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의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예수님을 가로막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입니다. 왜 격렬하게 저들이 반대했을까 생각해보면 오늘날도 그런 경우들을 많이 보는데, 출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변방 촌구석에서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았던 소위 비주류인사였기에 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자기들과 비교되고 같이 어울린다는 것이 싫었을 뿐입니다.

더욱이 유대 백성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는 다른 말씀의 권위를 갖고 계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불만이었고, 그러니 이들은 계속해서 어깃장을 놓았던 거죠. 게다가 여러 이유를 들어서 예수님과 논쟁하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일전에도 표적을 요구했었는데 다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했던 겁니다.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이들은 왜 표적을 구했을까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확실한 증거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대단한 증거를 보여주라는 거죠. 하지만 예수님이 계속해서 행하셨던 모든 치유와 기적들이 이미 보여주신 증거들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풍랑을 잠재우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오실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와 같은 증거들 앞에서 마음을 닫아버렸습니다. 왜 닿았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러니 설령 예수님이 비범한 표적을 보여주셨더라고 해도 그들은 수긍하고 물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랑하던 저들이 불신앙에 빠진 것은 이미 그들 속에는 잘못된 교훈이 자리 잡고 있어서입니다. 그릇된 의식화 교육의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요? 자기들의 구미에 맞는 것들로 덧칠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주변 잡기일 뿐입니다. 본질을 놓치면 불행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이루어 가고 있는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분별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잘못된 결정과 어긋난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질타하셨습니다.

16: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다른 것들에 대한 재능은 뽐내면서 정작 중요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저들이야말로 미련한 자들이라고 비난하신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면 참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작 나누는 이야기를 보면 복음 안에서 나누어야 할 것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2, 3절과 같은 잡다한 지식에 능한 것이지 정작 성경 이야기는 하지를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도 없고, 게다가 아는 것도 없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그냥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훈련의 자리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그것도 올바르고 균형 있는 훈련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표적만을 구하고자 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참으로 크게 비난하셨습니다.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

저들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생각과 음란한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구하는 것은 자기들의 구미에 맞는 메시아 상이라고 하는 그림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그랬고 심지어 제자들도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전까지 그랬습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세워갈 수 있는 그래서 열방을 대적할 수 있는 메시아에 대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으로 들어가셨던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어둠이라는 카오스에서 다시금 빛 가운데로 나오는 모습인 거죠. 하지만 이들은 이것을 볼 수 있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다른, 정확히 말해 오염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실패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과 짧은 대화를 그치고 길을 떠났는데,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편 쪽으로 이동할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먹거리를 가져오는 것을 그만 깜빡했습니다. 이 일로 제자들이 서로를 탓했던 모양입니다. 여전히 먹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실 때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먹거리 문제로 술렁거리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좀 묘합니다. 먹는 것과는 상관없어 보여서입니다.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렇게 뜬금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곡해해서 들었습니다. 떡을 가져오지 않은 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해석했던 겁니다.

16: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았음에도, 참으로 많은 장면을 보았음에도, 바로 앞에 계신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의미가 아니라 제자들은 예수님도 떡 걱정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계속 예수님이 행해오신 일들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의미들을 제대로 보았다면 지금 이렇게 떡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들을 기억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16:8-10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두 번의 기적적인 먹이심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심에서 특별히 떡 문제에서도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제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공급, 바로 우리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의 필요한 것을 너무 염려함으로써 정말로 문제가 되는 일을 못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단순히 가져오지 못한 떡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 제자들은 여전히 떡에만 생각이 머물러 있었으니 그것을 깨닫도록 예수님은 촉구하셨습니다.

16: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렇게 예수님의 질책을 듣고서야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16: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 두 집단은 실은 달라도 많이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은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고, 사두개인은 세속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삶을 파괴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바리새인이 사로잡혀 있는 형식주의이고, 사두개인들의 세속주의입니다. 이것들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이 둘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특별한 교훈을 찾는다면 메시아와 메시아의 성취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성취는 민족적, 정치적 차원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성취입니다. 유대 지도층이 연합하여 지지하는 메시아 사상이었고, 수많은 대중도 이 사상을 지지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사상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들의 생각은 누룩과 같이 모든 다른 것에 영향을 끼쳤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대적하게 하는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정보로 다른 사람들을 오해하고 편견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올바른 친교가 이루어지려면 제대로 알고 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과 동행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 동행이 아름답게 이어지려고 하면 우리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손길을 내미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처럼 우리의 생각을 오염시키는 것들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들어가 성경을 알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불신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에 깨어있지 않으면 한순간 불신앙이라는 부패에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처럼 불신앙이 세속적인 문제, 세상 것에 대한 걱정에 마음을 빼앗길 때 그것들은 누룩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여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말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했음에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 거죠. 알지 못한 겁니다. 그들은 그들을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도 만족시키시는 능력을 보이신 분과 여행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모든 것을 어리석게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를 불신앙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그분에 대한 보다 많은 증거를 기억하고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헌신은 보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들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요? 이것을 걸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영적인 잡동사니 양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을 취하려고 한다면 영적인 빈곤으로 인해 우리 생명은 죽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결코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채워가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변에 이런 이들이 과연 많이 있을까요?

우리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바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그분을 통해 이루어주신 구원의 기쁨 안에 거하고,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오병이어의 능력 안에서 항상 우리의 삶을 채우시는 주님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으며, 사는 자여야 합니다. 이렇게 믿고 있는 예수님과 지금 이 길을 동행하고 있습니까?

이 길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비전을 의지하도록 요구하시는 우리 예수님을 신뢰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으로 의식화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충분한 의식화가 될 때만이 형식주의와 세속주의, 잘못된 기독론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의 길을 걸어갈 것이고, 그와 같은 우리의 신앙적 삶은 더 이상 피곤하고 짐 된 시간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복을 풍성하게 누리는 축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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