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10월14일 주일예배
[ 신앙의 눈, 불신앙의 눈 : 신1장19-33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며칠 전 우연히 매우 감동적인 영화를 한편 보았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탬플 그랜딘이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콜로라도 주립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본인이 또한 자폐아로서 자폐증을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해 많은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탬플 그랜딘은 네 살 때에 자폐아로 말도 못했고, 보호시설에서 평생을 생활해야지 다른 이들과 함께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남 다른 면을 믿었습니다. 엄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기적과 같이 말을 하게 되자 엄마는 딸을 학교에 보냅니다. 물론 학교생활이 녹녹치 않았습니다. 사람과 살이 닿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가끔은 자기 멋대로 흥분해서 날뛰고, 사회성도 전혀 없어 어딜 가나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외로운 신세가 됩니다. 그런 그녀에게 과학 선생님 칼락은 유일하게 그녀를 믿고, 응원하는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었고, 그녀는 자신을 믿어주는 유일한 선생님, 칼락을 통해 문을 열고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회와 자신 앞에 펼쳐지는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때마다 칼락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면서 “이건 내가 또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되어 줄거야.”라고 되 뇌였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여 있는 문을 두려운 마음이지만 열고 나갔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템플 그랜딘은 스승 칼락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기며 겁먹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면서 그녀는 이모네 목장에서 생활하면서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었던 소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북미 전역에 길러지고 있는 소의 절반이 템플 그랜딘이 설계한 인도적 시스템에 의해서 사육되고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 탬플 그랜딘처럼 거대한 장벽을 넘어서 다른 세상을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대부분 폐쇄된 자기만의 공간에서 살아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통 사람들이 이 장벽을 다 넘어서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스스로 세워 놓은 한계사항들을 넘지 못하고 다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들을 사람들은 상실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높은 벽을 탓합니다. 탬플 그랜딘처럼 문을 열고 나가면 되는데 문 너머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전 영화를 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문을 열고 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저도 앞으로 수많은 문을 통과해야 할 텐데, 그 문 앞에서 겁먹지 않도록 격려해주는 영화, 뜨거운 용기를 주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새로운 문을 열려고 하면 저 너머에 펼쳐질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망설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새로운 문을 열고 나가야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마침내 그들 앞에 놓였습니다.
1. 하나님의 선물, 올라가서 차지하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시내산에서 광야 길을 열 하룻길을 걸어 마침내 그 문 앞에 섰습니다. 이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마련해놓으신 선물,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21절에“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들 앞에 있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면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 일에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엔 어떤 장애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가나안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격려하신 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또한 보여줍니다. 그들은 지금 열 하룻길에 걸쳐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가데스바네아에 왔습니다. 긴 여행 끝에 몸이 녹초가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은 당장 격렬한 전투를 하게 된다면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겁을 먹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 가데스바네아에서 멈칫하였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진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2. 가나안을 정탐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 숨을 고르며, 그들의 문 너머를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전쟁의 계획이 끝난 뒤였기에 "올라가서 차지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모세 앞에 나와 제안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야말로 그들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그들이 갈 길을 지시하시는 분임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에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여 그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을 두루 정탐하였고, 마침내 40일 후에 그 땅의 열매를 가지고 돌아와서 백성들 앞에서 보고하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그러면 당장에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3. 거역하고 원망하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 곳에 올라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그들의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시내산에서 열 하룻길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온 이들에게 무엇이 문제가 된 것입니까? 그들이 정탐을 보내고자 한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보면, 어느 길로 올라가는 것이 최선의 길인지를 결정하기 위함이었지, 그 땅의 정복을 시작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정탐꾼들의 보고 앞에서 결국 다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신의 말씀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그 땅이 얼마나 좋은 가에 대한 실제적인 보고까지 곁들여 그 좋은 땅을 그들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즉시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였고, 기꺼이 그 땅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반항하였고, 그들을 출애굽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동기를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7절에“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불평입니까? 이런 백성들의 불신은 이제껏 이루어놓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이끌어내셨는데, 그들은 얼토당토않은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보고자 했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정탐꾼들의 보고 중에는 25절에는 들어나지 않았지만 28절에 백성들의 불만을 통해서 두 가지 다른 요소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땅에 아낙 자손들이 있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들의 성곽이 요새화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보고가 백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낙심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거인족인 아낙 자손에 대한 소문을 애굽에서부터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녹아져 내려 공포에 질려 있으니 원수들이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이 이들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아낙 자손들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정탐꾼의 보고만 들었고, 예전에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상상력 그 자체가 더 큰 공포를 자아내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지레 겁을 먹었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정신적이고 철저한 영적인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종종 신앙으로 무장했다고 장담하던 이들이 어느 한순간 모든 신앙을 잃어버리고 자포자기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다가 하루아침에 누구와 말다툼 끝에 토라져서 돌아서버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뜨거워졌다가 갑자기 냄비처럼 식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제대로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시려면 무엇 때문에 애굽 땅에서 구원해내셨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다음에는 그 자리에 대신 공포와 걱정과 불안과 염려가 밀려들어오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4.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까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모세의 말을 듣고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이셨는지,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하기만 했다면 불순종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분이셨습니다. 30절에서 "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여정이 시작될 때 하나님이 원수들을 어떻게 무찌르셨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아낙 자손이 버티고 있지만, 그들의 요새가 점령하기에 힘들어 보이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거룩한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이곳까지 험한 길을 이스라엘이 고생고생해서 오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험한 길에서 사랑하는 자녀를 안고 가듯이 그들을 품에 안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31절에 "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안고 날마다 데려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를 건너올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를 정복하셨고,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셨고, 그들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공급하셨고, 미래를 보장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 믿을 만한 그들의 인도자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들의 생각 속에는 그들을 미워하고, 멸하시려는 나쁜 하나님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이 지난날에 자신들을 위해 앞에 선 인도자였다는 사실을 그처럼 쉽게 또 빨리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요? 이처럼 빈곤한 기억력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그들에게 예비 된 하나님의 복을 빼앗아 가곤 합니다.
5.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인생에는 중대한 기회를 만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몰두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 인생은 종종 완전히 서로 다른 대안을 우리 앞에 제시하곤 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결정은 우리가 평생 동안 누릴 것을 단 몇 초 만에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가지를 보도록 요청하였습니다. 19절에서 크고 두려운 광야를 목격하고도 안전하게 통과했던 사실, 30절에서 그들의 목전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싸우셨다는 사실, 31절에서 그들이 광야 여정동안 내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였습니다.
밀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인간이 취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일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을 홀로 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대적과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의 힘을 믿고 의지할 때는 승리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신뢰가 없으면 이스라엘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일어났던 생생한 구원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낙자손만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들의 적의 위력만 보았지, 하나님의 권능의 생생한 모습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여기 가데스바네아, 첫 번째 관문에서 우리는 소수의 신앙의 눈과 다수의 불신앙의 눈을 보게 됩니다.
우리 앞엔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수많은 문들이 있습니다. 그 기회의 문을 열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마련해놓은 약속의 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잃어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이런 모습으론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를 두려워했기에 결국 그 땅을 받는 일이 잠정 중단되었고, 그들이 아닌 그들의 자녀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40년 뒤에 주어져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었던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이 현실로 바뀌는 것을 보도록 허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루어지는 백성들의 문제는 불순종과 빈곤한 기억력과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과거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능히 입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미래의 어려움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처럼 미래의 크고 작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땅을 향하여 경계선을 넘어 진입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문제는 장대하고 강대한 아낙 자손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실로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늘 두려움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아말렉과의 전쟁을 거치면서도 그들을 여기까지 이끌어왔고, 그들이 장차 대면하게 될 아낙 자손마저도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시리라는 사실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불신이 팽배해 있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확신을 신뢰하고, 위험이라도 기꺼이 무릅쓰고자 하는 신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오직 위험만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능력을 믿지 못한 두려움은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떨쳐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우리 앞에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우리를 안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승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강력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바랍니다.
템플 그랜딘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고백합니다. "전 완치된 게 아닙니다. 평생 자폐아겠죠. 저의 엄마는 제가 말을 못할 거라는 진단을 믿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제가 말을 하게 되자 학교에 입학시켰어요…. 제가 뭔가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최선을 다했어요. 그분들은 아셨습니다. 제가 다를 뿐이라는 것을! 모자란게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게다가 저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까지도 자세히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엄마는 나를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셨어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것들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관문이 되었어요. 문이 열렸고, 제가 걸어 나왔습니다. 저는 템플 그랜딘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장애가 없을 지라도 우리는 모두 부족한 것투성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새로운 기회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움으로 나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라며 다짐하고 믿음으로 그 문을 열수 있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의 기회들을 제공하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더 이상 두려움가운데, 낙심가운데, 절망가운데 살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 앞에 행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믿음의 전진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한 선물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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