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9일 주일예배
[예수님을 보게 하심에 감사드리자: 마 11장 25-27절]
하버드대 심리학과에서 만든 영상을 통한 실험에서 사람들이 고릴라와 다른 변화를 볼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자 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단순한 현상과 변화조차도 분간해내기 어려운데, 하물며 영적 세계의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은 어떻겠습니까? 숱한 오류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통해 안다고 하지만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무지함을 이스라엘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셨어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은 이스라엘은 받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에 대해 수많은 오류로 점철된 역사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도 그랬고, 가나안 땅 정착기에서도 그랬고, 왕국 시대에는 극에 달했다가 먼저 8세기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주전 6세기 남 왕국 유다도 멸망하고 맙니다. 거듭되는 열강의 지배를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해방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할 메시아를 약속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약속은 금방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참으로 오랜 시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긴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 약속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계시 된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길로 갈 뿐이었습니다. 지식은 쌓여 가는데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식이 아닌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십니까? 종교적인 독선은 인간의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적 앎의 여정에서 매 순간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전혀 모른다고 하실 테니까 말입니다.
긴 기다림 끝에 하나님은 저들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외침에 이어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외치시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르렀음을 알리셨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적이 일어났고, 병자들이 회복되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떠났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해방을 맛보고,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둘 예수님이 지향하는 것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볼 수도 없었습니다. 수긍할 수도 없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자기의 구미에 맞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도 멀었던 겁니다.
한때는 기대하며 환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생각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되니까 뒤돌아서서는 경건한 자들이 아닌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향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에 응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외치시는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저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회개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을 들고 나가 회개하라고 외쳐도 사람들이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회개할 게 없는데 무슨 회개를 하겠습니까?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에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씀을 보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그러니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성경은 예수님을 오실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나사렛 출신 목수인 예수가 메시아이실 거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게 종교적으로 박식하고 지혜로운 이들임에도 말입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가버나움이라는 곳의 사람들 또한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었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계시 된 말씀에 무지해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반응에 예수님의 평가는 냉엄하셨습니다.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가장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할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셨잖습니까? 여러 예언자를 통해서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을 순전히 바라보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막상 메시아이신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회개하지 않음을 꾸짖으신 후에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누군가에게는 숨기셨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타내셨다는 겁니다.
마 11:25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그분을 통해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듣고 예수님이 주님 되심을 믿어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우리는 진정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기지 않으시고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드리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에 율법에 능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유대 사회의 지도층이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이들이 하나님 말씀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지혜로운 자들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모든 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점에서 단순히 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라고 여기는 자들은 어떠한가요? 스스로 만족하며 지혜롭다고 하여 주의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안다고 여기는 지적 교만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삽니다.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확신하니 외부의 구원자가 필요 없는 거죠.
반면에 어린아이들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 대한 대칭어로 ‘어린 아이들’을 사용하셨던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의 기준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단순히 어린 아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하고 순박한 자들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의 가르침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것을 감사하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막지 않으시고 순전한 마음으로 도움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닫으시면 누가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처럼 차별화된 계시를 통해서 진정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자만이 아버지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하시기를 기뻐하신 거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복음의 내용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인터넷 서핑하듯이 탐색으로 단순한 사색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에도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리어져 있기에 수많은 정보처럼 그냥 접할 뿐입니다. 거기에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인간의 독서와 연구, 명상과 숙고에 의해 도달하는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계시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알려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소량의 정보를 접했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아버지를 아는 것은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외에는 알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계시가 인간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 곧 성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로 먼저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평안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돌아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 알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자기를 믿고 자기의 방법과 지혜, 능력을 의지하는데 어떻게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자가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입니다. 아이들이 참아내며 수고와 짐을 지는 것을 보았습니까? 조금만 힘들어도 발을 동동거리며 엄마와 아빠에게 두 손을 벌리잖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들만이 오늘 예수님이 초청하는 말씀에 응할 수 있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즘 사람이 얼마나 수고하며 살고 있습니까? 계속해서 밀려드는 많은 일들로 피곤함에 지쳐있습니다. 짐을 벗고 싶은데, 벗어버리기는커녕 여기저기에서 짐을 더 올려놓습니다. 그 수고와 그 짐을 지고 가려니 얼마나 지쳐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당시 청중들에게는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육체적 의무 외에도 전통적으로 부과되고 있는 율법과 유전의 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지 못해 인간들이 부과한 짐일 뿐입니다. 그것을 진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은 속박이 아닌데, 구원인데 스스로 그 짐을 지고 그것을 경건이라고 했으니 하나님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오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이들이 범했던 영적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모든 자들을 주님께 오라고 부르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을 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주님 안에서의 회복과 쉼의 자리로의 초대에 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설교동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 마 12장 1-14절 (0) | 2023.03.05 |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마 11:28-30 (0) | 2023.03.04 |
[복음과 현실 사이에서: 마 11장 2-6절] (0) | 2023.02.19 |
제자로서 합당한 기준: 마 10장 34-42절 (2) | 2023.02.15 |
선교적 삶을 위한 내적역량을 강화하라: 마 10장 26-33절] (1) | 2023.02.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