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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의미: 마 8장 18-27절

by 최수근 2022. 11. 13.

2022년 11월 13일 주일예배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의미: 마 8장 18-2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이번 이태원 참사를 통해 드러난 불편한 사실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기가 그 자리에 왜 있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모르는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의 목적이 있어 거기까지 같겠지요. 나름으로 열심히 했다고 항변하며 억울해하겠지요. 그러나 참사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통해 볼 때, 공직의 책임자들로서 그들은 허수아비와도 같았습니다. 거기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뚜렷한 소신과 공적 책임 없이 자기 이익과 목적만을 위해 공직을 차지하고 있다면 나라의 불행입니다.

이 문제를 기독교로 가져와 살펴보면 똑같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왜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분명한 부르심의 목적과 공적 책임이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로서의 부르심이 있고, 각각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부르심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나가야 할지를 성경은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고, 그걸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그 부르심 앞에서 잘못된 선택과 공적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을 치료하여 주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언제나 인간의 아픔에 대한 예수님의 항거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겪는 고통이 그저 환경과 질병의 결과가 아니라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는 인간의 악이 만들어낸 불의함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보면서 교회는 공동체의 구조적 악을 직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태를 묵인하지 않을 책임, 결국, 타자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 항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실현하는 실천 속에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생명력을 갖고 다시금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으로 살아가는 삶과 영향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실천도 못 하며 그냥 무리 속에 파묻혀 교회에 갔다가 다시 교회를 나와 일상으로 돌아가 한 주간을 보내고 그런 일이 매주 반복되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도 그에 따른 능력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비추어지겠어요.

고통받고 있는 세상을 향한 우리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그저 작은 욕심으로 가득 차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지켜가려는 세상에 널려 있는 지금의 저들과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 무작정 뛰어들지 않고,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먼저 보도록 하셨습니다. 단지 자기감정에 이끌려 나섰다가 쉽게 포기하는 일을 막으신 거죠. 우리 믿음의 여정이 난항을 반복하는 것은 출발점에서 자신의 기대와 믿음의 길에서 맞닥뜨리는 것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점에서 마태복음은 참다운 제자도를 위해 우리의 흐트러진 초점을 예수님께 올바르게 맞출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게 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자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가기를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피하셨을까요?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무리의 관심은 제자도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강력한 메시아가 일어나 로마 제국에 억압받고 있는 자신들을 해방해주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지, 이 땅의 나라를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군중의 환호와 호감은 실제적인 예수님의 목적을 파악하는 순간 언제고 식어버릴 반응이었습니다. 군중은 그들의 기대가 무너졌을 때 예수님에게서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6: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자기 이익과 멀어질 때 사람들은 매몰차게 떠납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출발이 잘못되었다면 이 일을 피해갈 수 없어요. 이 실패가 반복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떠나 부리나케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려고 하시는 예수님께 한 서기관이 다가와 말합니다. 8:19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대부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과히 혁명적으로 율법의 틀을 깨고 계시는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자들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서기관은 아니었지만, 비록 갈릴리라는 변방의 서기관이라고 해도 그는 기득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을 목격하고, 놀라운 말씀을 들으면서 그 권세에 탄복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는 서기관을 예수님은 흔쾌히 받으시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를 매우 부정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20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한껏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이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생각처럼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불확실한 길에 들어서는,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른 랍비들을 따를 때처럼 그곳에서 배우고 사는 동안, 무언가 안락한 삶과 보상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란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는 삶이고, 힘든 훈련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겁니다.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결단하면 많은 영역에서 불편한 일이 벌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는 반대편에 서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면 모든 영역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좇음으로써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려면 먼저 우리의 시선이 달라져야 합니다.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여 살고 있다면 결코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주님을 따르는 것,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치르는 대가도 물론 크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산다는 의미와 가치는 단순히 물량화할 수 없는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길을 갈 수도 있고, 또는 못 갈 수도 있습니다.

서기관에 이어서 제자 중 한 사람이 주님을 잠시 떠나 개인적인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오고자 주님께 요청하였습니다. 21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들은 장례를 치러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는 너무도 막중해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모도 모르는 막 되어 먹은 자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친의 장사를 먼저 치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제자에게 땅 위의 그 어떤 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장례는 다른 사람들이 대신 치를 수 있지만,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선순위에 밀리기 시작하면 그다음 번에 따른다는 보장도 할 수 없습니다. 제자가 되는 일을 뒤로 미루기 위하여 핑곗거리를 찾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음의 일보다 생명의 일이 더 먼저 임을 생각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셨던 거죠.

다른 계획이 무엇이건 제자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인간적인 충성들은 그다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다른 것들이 우리 시선을 끌려고 풍성한 보상을 들이민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좇겠다는 결단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간다고 해서 세상의 명예와 부가 약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이 땅에서의 확실한 보상과 안전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래서 머뭇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세상의 안전장치들은 우리를 끝까지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방관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제자의 삶을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이 은혜를 인지 하지 못할 때 격랑이 이는 환경 앞에서 두려워하고 근심하게 되는 거죠. 예수님 옆에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가시기 위해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갈릴리 호수의 파도가 거세지면서 제자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편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난리 통에도 곤히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황급히 깨우며 외쳤습니다. 8:25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들 중엔 어부 출신들도 있었지만, 어부답게 풍랑을 이겨보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모두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나시자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8:26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보통 정상적인 순서라면 먼저 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풍랑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먼저 질책하셨습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위기의 상황에서 가져야 할 믿음은 그런 호들갑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들 곁에 예수님께서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일렁이는 파도 앞에서 예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와 같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예수님은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거친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워 떨던 제자들은 파도를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놀라워했습니다. 27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이제 제자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도 예수님을 치료자로, 랍비로, 또는 주님으로 여겼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주님의 권능은 제자들이 예상한 정도를 크게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질병만이 아니라 자연계까지도 미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마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뒤로 미룬 채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그림을 조금 더 채워나갑니다. 마태복음 10장까지 이어지는 기적들을 통해 제자들이 점차 더 온전하게 예수님을 이해하며 알아가게 되는 과정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태는 오늘 우리도 예수님은 대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지속해서 던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인격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자리하실 때만이 예수님을 따라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고 그분과 함께 할 수 있을 때, 어떤 위험과 대가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충성으로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참 제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참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가장 우선 되어야 하며, 세상적인 기대를 충족하는 길이 아니라, 고난과 자기 부인의 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만 합니다. 이 길은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가야 하는 길이어서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위험한 길입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돈, 건강, 성공이 온다는 엉터리 가르침과 기독교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적인 축복을 누리기 위해 주님의 뒤를 따르려 한다면 결코 그 목적을 누구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에 관한 관심을 다 버리지 않은 채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자 역시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와 같은 선택 앞에 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구원, 은혜, 축복을 말할 때는 좋아하다가도 헌신, 십자가, 자기 부인, 고난, 제자도를 이야기하면 부담스러워하고 떠나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고난과 희생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과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 할수록, 참 제자의 길이 우선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커지기 때문입니다.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세상의 가치와는 반대로 가는 길이기에 거센 역풍도 당연히 있습니다. 가는 길을 저지하기 위해 아주 거세게 몰아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폭풍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풍랑은 우리를 결코 삼킬 수 없습니다. 우리 시선은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풍랑이 아니라 평온한 가운데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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