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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마5장6절

by 최수근 2014. 7. 13.

2014년7월13일 주일설교문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마5장6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여러분!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은 너도나도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은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일과 노력의 동기가 됩니다. 만사가 행복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계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의 비극은 아무리 행복을 갈구한다고 해서 과연 행복해 질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행복의 조건은 다양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돈이, 병약한 자들에게는 건강이, 수험생들에게는 합격이, 젊은이들에게는 취업과 결혼이, 부모들에게는 자녀의 건강과 성공이, 사업하는 이들에게는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대형계약이 행복의 조건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는 과자 한 봉지가 행복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조건들이 충족되어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결핍이 사람들의 행복한 마음에 구멍을 내어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여기에서의 행복만을 추구하다가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세상이 끊임없이 범해오는 과오라고 할까요? 2500년 전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처럼 행복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의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아테네 시민이여, 오로지 돈을 벌고 명성과 위신을 높이는 일에 매달리면서 진리와 지혜와 영혼의 향상에는 생각이나 주의를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의 속성은 신앙의 목적조차도 이 땅의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복에 두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도 자기 행복을 위해 도구화시켜버립니다. 자기 안에 갈망을 충족하고자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또 그와 같은 사람들의 속성을 이용해서 급속도로 성장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빙자한 종교비즈니스입니다. 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들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말년에 암으로 혹독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를 찾아가 젊은이들에게 외쳤던 최후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말라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도 축복과 행복을 구하면서도 거룩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분명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이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야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길은 살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 옛 사람인 내가 죽어야만 하는 길인데 난 죽지 않고, 오로지 축복과 행복을 구하려고 하니 복음의 목적이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채워지지 못한 마음은 강퍅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냉소주의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서운 영적 질병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갈망

이스라엘의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자기들을 해방시켜주실 것이라는 갈망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 각종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귀신으로부터의 해방,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내적 갈등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자기들의 열망을 갖고 예수님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이들의 갈급함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가치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이들이 정녕 복이 있는 자인지를 선언하셨습니다. 그게 산상수훈에서의 팔복입니다. 오늘 6절 말씀은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자들은 솔직히 모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그 앞에 배부른 자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우리에게도 주리고 목마름이 있기에 여기 있는 것입니다. 당시 기득권자들은 대중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가는 것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경계하고, 시기했습니다. 그런 배부른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누가복음625절에서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 앞에 나와 있는 주린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들이 복이 있다고 하셔야 하는데, 단순히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아니라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환경에서 육체적인 배고픔, 목마름은 그렇게 심각하게 와 닿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물도 수도꼭지만 틀면 펑펑 쓸 수 있습니다. 각종 생수를 목마르면 사먹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6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먹을 것이 부족했고, 물도 부족해서 여름철이면 식수차량이 며칠에 한 번씩 배급을 나오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는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이 천지사방에 깔려 있었습니다. 하루 한 끼가 뭐겠습니까? 며칠에 한 끼 먹으면서도 감사하며 살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먹을 물도 마을 우물에 가야 물을 길어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물도 수원이 마르면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이 배부르고,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간절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간절함을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사회기득권층은 전혀 이루어줄 수 없다는 것을 일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 메시아만이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질서를 통해 메시아왕국을 세우시고 그들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목마름으로 나온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렇게 주리고 목마른 백성들을 향해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순간 솔깃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의라는 말보다는 배부를 수 있다는 말에 관심을 가졌을 거예요. 그 당시 하층민들의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배고픔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들을 먹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인 그들의 관심을 넘어서 예수님은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당장에 육체적인 주림과 목마름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이상의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는 채워짐을 가능하게 하는 저들의 새로운 삶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는 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는 몇 가지 양상을 포함합니다 

첫째, 학대받거나 부당함을 경험했던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인 정의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도를 여기에서만 찾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많이 있어왔습니다. 독재자를 향해 항거하기도 하고, 세상의 불평등함과 불공평한 분배의 개선을 위해 목숨 걸고 노력했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시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며 정의실현을 위해 애쓰던 이들을 통해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많은 문제들이 개선되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도 했지만 이것만이 하나님의 의의 최종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둘째, 죄로부터 벗어난 삶을 소망하는 이들을 위한 개인의 윤리적 의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절대시하다보면 보다 더 거룩해지고자 하는 생활, 그것이 율법화가 되면서 바리새인들의 모습에서 비쳐진 것처럼 남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위선적인 의로 전락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을 주장하다보면 자기 의에 빠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규정에 얽매인 인생이 되어 오히려 채워지는 지는 삶이 아니라 피곤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연약한 지체를 향한 나의 정죄로 인해 다른 사람까지도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의 의, 우리의 의지와 행위에 지배되지 않는 하나님 구원의 의, 바로 복음의 의를 말합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이며,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의 회복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본래 처음에 맺어주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의 의의 범주에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우리들의 개인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가 포함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말씀하셨을 때 바로 복음의 의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덧입혀지기를 바라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의 의가 이 땅과 자신의 삶 가운데에 임하기를 매일매일 갈망하며,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를 소망하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6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가 실현되는 것을 사모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주리고 목마른자의 상황은 매우 궁핍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당장 채움을 받지 못하면, 죽고 말 것입니다. 아사직전의 상황입니다. 오래 전에 아주 잔인한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사 직전에 있는 아프리카의 한 어린 아이가 힘없이 앉아 있는 저쪽 편에 그 아이를 바라보는 독수리를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아이가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다. 이 아이의 갈망은 딴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주림이 채워지고, 그의 목마름이 채워져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데 있습니다. 그건 단순한 갈망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갈망입니다. 죽기를 바라보고 있는 독수리의 갈망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자의 갈급함도 이와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반대편에 서 있는 세상의 모습과 자신의 영적인 파탄으로 인해 자신의 죄인 됨을 애통해하면서, 그와 함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위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주시기를 겸손하게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삶에서 거룩함의 열매로 나타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매일 매일 갈망해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이거 아니면 전 죽습니다. 외칠 수 있는 갈급함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거지입니다. 거지는 주린 배를 채우고 갈증에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서 인간적인 모든 체면을 돌아보지 않고 음식을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욕망이 채워짐을 바라는 수준과는 전혀 다릅니다. 종교적인 경험에 목마른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안에 종교적인 경험에 갈급한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그래서 어딘 가에 새로운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한참 그 속에서 만족하다가 또 다시 새로운 은혜가 있다고 하면 또 다른 곳으로 몰려갑니다. 이런 종교적인 경험의 갈망을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주님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막연한 종교적인 감정과 영적인 굶주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굶주림은 나의 전 존재와 나의 생활 전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최고의 갈망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갈망은 우리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으로 우리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를 붙잡아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복인 것입니다.

배부를 것임이요

그러기에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적인 엑스터시도, 자기만족도 아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적인 갈망을 갖고 주께 나오는 자들은 그와 같은 갈망이 결국은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채워지는 것입니까? 사람들의 갈증을 채워주는 많은 것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들은 채우고 채워도 또 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다시금 목이 마르고, 그래서 더 색다르고 자극적인 샘물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니 오히려 더 피곤하고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주리고 목마름을 온전하게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시42:1에서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를 찾음으로써 갈급함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생명으로의 초대에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현재에도 개인적인 주림과 목마름을 채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채워짐이 오늘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오늘도 채워주시고 배부르게 해주시겠지만 하나님의 만족케 하심은 최종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미래의 통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 기대와 소망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치지 않도록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갈망에서 변화로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단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고 채워주시는 걸까요? 우리에게 전가된 의가 칭의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성화라는 측면에서도 보아야 합니다. 천국의 영역에서 삶에 수반하는 변화가 경험될 때 하나님의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에서 실제가 됩니다. 그 나라의 삶의 올바른 것들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을 경험하면서 현 시대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성화의 삶입니다. 의에 대한 이런 열정적인 추구는 변화된 마음에서 나옵니다. 이런 변화된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은혜를 갈망하고,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살아가겠습니다.”라는 겸손한 마음이 우리의 삶을 끌어가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채워주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은 복음의 진리가 마음 속 의식의 영역으로 옮겨졌을 때 그 빛에 순종하는 가 에 달려 있습니다. 그와 같은 순종아래 우리가 하나님과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우리의 처한 상황에서 그 말씀을 적용하도록 돕습니다. 성령께서 이처럼 말씀을 기억나게 하실 때 우리는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 한 번의 시험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들을 넘어서도록 하는 것은 바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입니다. 배부르면 끝입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난 이 정도면 족해라고 생각하면서 다람쥐 쳇 바퀴 돌듯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건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은혜가 무궁무진한데 말입니다.

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순종하며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추구하고, 의로운 삶의 모범이 되며, 악한 것에 휘둘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가져오는 의의 도구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10절에서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떡, 생명의 음료

우리가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기를 갈망하며 작은 예수로 살아가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매우 귀한 선물을 준비해주십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주리고 목마른 성도들을 위해 준비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수이십니다. 6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4: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신이 길 잃어 방황하는 자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죽도록 사모하는 자들은 비록 이 땅의 행복의 조건들로 그 삶이 메워지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만족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은 모든 기독교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소유, 권력, 쾌락과 같은 것들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에게 속고 말 것입니다. 그것들은 갈증을 경감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더욱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 나라와 통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갈망을 갖고 믿음의 경주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오늘 우리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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