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5일 주일예배
[제자로서 합당한 기준: 마 10장 34-42절]
부모가 자기 아이들에게 잘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무언지 알고 계실 겁니다. “엄마,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아?” 그럼 아이는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나오는 현명한 답이 있어요. “엄마, 아빠 둘 다 좋아요.”
자기가 더 사랑받고 더 인기 있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랑을 빼앗기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질투가 불일 듯 일어납니다. 질투는 상대를 너무 좋아해서 상대가 나만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감정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잘해주면, 기분이 나쁜 게 이 감정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극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런 질투는 소위 “막장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소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인간에게 밝히시기를 자기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우상숭배를 금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동으로 규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행위를 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신 5: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건 우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방 신들로 가득했던 애굽을 떠나면서 하나님은 그들 속에 자리하고 있던 수많은 우상을 척결하셨지만, 다시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절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견하면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 영역이 가족, 혈육으로 확장될 때 우리의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족과의 관계가 나빠지기를 원하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가족을 다 살리고 싶어 합니다.
미움, 갈등, 분열, 적의는 세상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이리 떼와 같은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이와 같은 논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예수님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가족들 간의 불화를 일으킨다니요? 어떻게 우리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요 14:27에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기에 우리는 나아가서 화목하게 하는 자여야 하는데 불화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하늘의 샬롬이 문제가 있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 평안의 복음을 접하는 인간의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 10장 34~36절은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결과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결과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메시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로 인해 갈등, 불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것인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요? 왜 거부하고 왜 미워하는 걸까요?
그것은 가치 충돌로 인해 일어나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모태신앙인 경우는 경험할 수 없지만 처음 가족이나 친척 중에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없는 집안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평안하게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작은 갈등이든지 큰 갈등이든지 자기가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간 지배적이었던 질서와 세속의 가치에서 하나님 나라 질서로 바뀌려고 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저의 어렸을 적 경험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두 가치가 공존할 수 없어서입니다.
갈등의 요소가 많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주일예배입니다. 남편이 혹은 아내가 주말이면 가족과 시간을 갖고 싶은데 하필이면 그 시간에 아내나 남편, 자녀가 주일예배를 가는 거죠. 한두 번은 넘어갈 수 있는데 매 주일 그런다면 결국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믿음을 거두어들여야 하겠습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믿음을 접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가 처한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황이 어떤 현실에 부딪힐지를 소상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경험은 복음의 선포에 따르는 현실의 한 부분입니다. 그 상황들을 시뮬레이션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를 고민하라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 겁먹고 믿음의 길에서 옛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은 예방접종과도 같습니다. 이 상황을 극복하고 이기는 것이 참믿음 아니겠습니까? 그 결과는 구원의 선물인 것이죠. 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기에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불화로 인해 제자가 예수님께 드리는 충성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가족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에서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는 가장 존중되고 있습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가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중요한 가치에 중대한 도전을 하셨습니다.
37절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단지 개인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만은 아닙니다. 가족 구원에 대한 열망도 있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가족은 우리 삶에서 우선 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족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가족에 대한 사랑보다 더 커야 한다는 말씀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너무 이기적인 요청이 아닐까요? 둘 다 사랑할 수도 있잖습니까?
관계의 단절은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움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걸까요?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족을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사랑, 헬라어 “필론”은 비록 이 말이 가족에 대한 친밀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단순히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제자의 길에 있어 핵심인 충성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헌신과 충성이 삶으로서 약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비교 대상으로서 충성과 헌신이 아닌 절대 헌신과 충성에 대한 요청이신 거죠.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단호한 충성과 헌신만이 제자로서 합당하다고 말씀하십니다.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잣대는 분명해졌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삶의 문제나 곤경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부정을 수반하는 그리고 진실로 자아에 대해 죽는 것을 포함하는 철저한 순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애착과 충성은 이제 훨씬 더 큰 명령, 즉 절대적인 순종과 절대적인 자기부정을 포함하면서 제시되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철저한 순종과 자기부정의 모범이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길과 그렇지 못한 길의 결과를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대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습득입니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요? 이것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예수님에 대한 충성과 제자의 길과는 무관하게 자기가 바라는 조건의 삶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건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길과 같습니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따랐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크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고, 끝내는 모든 것을 잃게 되지 않습니까? 더욱 불행한 것은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결코 상속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반대로 “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 즉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의미하는 자기부정, 심지어 순교라는 결과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는 자기부정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이건 마지막 때에야 가서 누릴 선물은 아닙니다. 물론 말세에 뚜렷하게 실현될 약속이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도 이 기쁨과 하나님과의 동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먼 훗날만 우리가 보고 가기에는 너무도 먼 길처럼 여겨지기에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신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하여, 즉 복음을 위하여 제자는 심지어 죽음의 자리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며 예수를 따르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제자에게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 순교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무자비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제자로 따르기 위해서는 분명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인간관계 들 중 일부의 희생, 심지어 가장 친밀한 관계의 희생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 단절을 요청해 오실 때 어떤 이들은 순종했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따르기를 주저하거나 거절한다면 나를 통해 우리 가정 안에서, 혹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많은 생명에 대한 기회를 스스로 닫아버리는 비극적인 선택이 될 겁니다.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우리는 넘어서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는 소명에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놀랄 만한 선물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무익한 추구를 포기하는 사람들, 그 대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데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 기꺼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생명을 찾는 사람들이고, 영원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하늘의 상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마 10: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그 상을 결단코 잃지 않으리라 하셨습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좇아가는 우리를 세상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이해하는 식으로 자기 성취를 추구하지 않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충성과 헌신을 결단한 자들입니다. 오직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기의 삶을 미워하는 사람들이며, 부모 형제 자녀를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이런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하고 영원한 자기실현을 이루고 나아가 구원의 성취와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고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합당한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충성과 헌신을 약속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동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을 보게 하심에 감사드리자: 마 11장 25-27절] (0) | 2023.02.19 |
---|---|
[복음과 현실 사이에서: 마 11장 2-6절] (0) | 2023.02.19 |
선교적 삶을 위한 내적역량을 강화하라: 마 10장 26-33절] (1) | 2023.02.15 |
선교적 삶을 위한 전략: 마 10장 11-23절 (0) | 2023.01.17 |
선교적 삶으로의 초대: 마 10장 1-10절 (0) | 2023.01.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