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동영상

[구원의 패스워드: 행 4장 1-12절]

최수근 2017. 2. 26. 23:16

2017년 2월 28일 주일설교동영상

[구원의 패스워드: 행 4장 1-1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생명교회 최수근 목사

요즘 종종 실수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있습니다. 자주 패스워드를 잃어버려 패스워드를 찾느라 고생을 합니다. 분명히 맞는 것 같은데, 일치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만 뜹니다. 비슷하다고 결코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거부될 뿐입니다.

물론 비슷하게 간다고 해서 세상만사가 다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본래 의미는 목표로 가는데 여러 방법이 있으니 굳이 한 방법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헌데 이게 지나쳐 과정은 무시하고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의미로 변질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성장 지상주의 시대에 최고의 시대정신으로 통할만 합니다.

이것은 종교에서도, 특히 구원의 길이라는 면에서 오랜 시간 다투어오던 부분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을 보면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루트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보면 두 가지 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력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불교는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스스로 부처라고 가르칩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자력종교적 메시지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인간 안에 신적인 능력이 있고, 변형일체를 통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땅의 유한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론은 그럴 싸 해보이지만 실제 그 끝까지 가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대인들은 이 길을 가려고 합니다. 이게 더 인간적으로 볼 때 주체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 타력종교의 길입니다. 특별히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인식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죄인이라는 말이 윤리적인 죄인이라기보다는 결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길거리에 나가서 당신은 죄인이야라고 말하면 봉변당할 겁니다. 정말 죄인인데 죄인이라고 해도 생떼를 부리며 난리를 치는 세상인데 말입니다.

그 점에서 인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풍토와는 이 길이 잘 맞지 않아 보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신에 대한 이야기는 고리타분한 옛적 이야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영악해도 근본적인 문제들, 삶과 죽음의 진정한 문제를 스스로 헤쳐나 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땅에 존재할까요? 일상생활의 문제는 지혜롭고 이성적으로 헤쳐나 갈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에 견유학파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과는 타협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죽음과 맞서기로 합니다. 죽음을 조롱하고 죽음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냥 허무하게 죽을 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 유대민족도 오랫동안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에 이를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율법의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헌데 갈릴리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운동이 그들의 신념과는 다른 것을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을 술렁거리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불씨를 꺼버리고자 그들의 지도자였던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제자인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외침에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자기의 의를 통해서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사람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얼마 후에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베드로의 소리에 일어나 걸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는 외쳤습니다. “이 일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완전하게 낫게 하였느니라.”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해 보이는 것 같지만 속으로 병든 이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려니 힘들지 않습니까? 이걸 벗어버리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위한 회복의 프로그램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남자만 약 오천 명이 믿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깨달은 겁니다.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부랴부랴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제자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 다음 날 종교지도자들은 옥에서 갇혀 있던 제자들을 불러내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세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구의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살아가느냐고 말입니다. 그 말은 곧 세상의 질서에 왜 역행하며 살려고 하느냐는 질책입니다. 함부로 나대지 말고 그냥 순조롭게 살라는 협박입니다.

하지만 그런 협박 앞에 제자들은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그들의 무지로 거부했던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을 회복시켜주시는 능력의 근원되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지금까지 그들이 애쓰고 애썼던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것입니다.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더 이상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이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 루트가 있는 것처럼 구원에 이르는 길도 예수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적인 길이 있다고 다원주의는 이야기가 합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것처럼 그게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만은 오직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음을 주장합니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굳게 잠겨 있는 구원의 문이 과연 여러 개의 키를 가지고 쉽게 열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게도 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저것 눌러보다보면 완전히 잠겨버려 열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자신만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길은 하나뿐입니다. 다른 길은 이를 것처럼 보이지만 위험한 길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어야만 합니다. 그 이름을 통해 모든 억압의 자리에서 자유하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통해 완전히 우리의 상함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통해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우리의 결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봅시다. 많은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뭔가를 결정할 때 너무 생각이 깊어지면 바른 결정이 어려워집니다. 나에게 확신이 서지 않으면 긴 세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간 이들을 보십시오. 가짜 그리스도인 말고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밑져야 본전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길에는 밑지는 일은 없습니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두 길 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