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 열린 신앙 : 눅24장44-49절
2013년3월31일 주일설교원문
[ 열린 마음 열린 신앙 :눅24장45-49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앞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고백하던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공허한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길 잃은 양같이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 안식일 다음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Ⅰ.그들은 불신의 깊은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깊은 슬픔에 잠겨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뜻하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이들의 기대를 무참히 꺾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 회복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처형’으로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기대와 신앙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날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흉흉한 소식을 듣고 이게 어찌된 일인지 서로 이야기 하며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두 사람에게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리어지다”는 말은 고정되어 변동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매우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에만 매어있어,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 곁에 함께 하시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미 페루에 거주하는 피로 족이라는 원주민은 의심을 ‘ 굳은 마음을 가진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하나의 생각에 마음이 굳어버린다면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게 됩니다. 우린 이런 일들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이미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으니 곁에 동행하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빈 무덤에만 집착했지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불신의 깊은 늪 속에 빠져 걸어갈 때, 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닫혀 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시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식변화와 영적각성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가 살고 있는 도단 성을 이방나라인 아람군이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서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이때 엘리사의 사환이 이 사실을 보고 엘리사에게 위험한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대답하기를 16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했습니다. 엘리사의 눈은 아람군대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뜨지 못해서 하나님의 군대를 보지 못하는 사환의 눈에는 아람군대만이 보였고 , 이로 인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설명으로 납득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6장17절에 보시면, 엘리사는 사환의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처럼 영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모든 사람은 인간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합니다. 그래서 큰 낭패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베드로를 둘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고난 받고, 죽임 당한 후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다분히 인간적인 눈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그리 마옵소서.”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였습니다. 베드로의 눈이 가리어져 하나님의 크신 계획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불신의 깊은 늪에 빠져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 “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들은 미련했습니다. 바보스럽고 무지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더디게’ 신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시간적으로 꾸물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액면 그대로 100%믿지 못한다는 꾸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 성취로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구약시대의 예언까지 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인간적인 기대를 걸고 예수님을 추종하다가 “십자가 사건” 과 같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에 얼마나 많이 부딪쳤었습니까? 그때마다 우리도 예수님을 떠났었습니다. 깊은 불신의 늪에 빠졌었습니다. 왜 제자들이 이처럼 깊은 불신의 늪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Ⅱ.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죽기 전에 말하기를 “내 제자들 가운데 오직 하나 만이 나를 이해하였다. 그런데 그 한 사람마저도 나를 잘못 이해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사이에 막혀 있는 담이 없어야 하고, 서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이해란 그저 수박 겉핥기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3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간에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많은 이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선 살아생전에 자신이 고난 받고, 죽게 될 것과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누누이 말씀해 주셨지만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질 못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호하는 것만을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예수님의 참모습을 잘못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능하신 선지자 혹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알았습니다. 21절“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하늘의 영광을 새롭게 회복하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머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36절-42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하기 보다는 놀라고 무서워하였습니다. 이것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님이 유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부활한 예수님으로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껍질뿐인 신앙입니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에게 부활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무지는 하나님의 저주”라고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 시각 장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으면서도 그 분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슬픔에 잠겨 있다면,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실망하고 용기를 잃고 의욕을 잃어버린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났고, 우리의 눈과 귀가 어두워져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엠마오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낭패와 실망과 근심과 걱정에 싸여 엠마오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절망 중에 있는 두 제자들과 함께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Ⅲ. 주님께서 닫힌 눈과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31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라 했습니다. ‘밝아졌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디에노이크데산’은 ‘열다’의 과거 수동형입니다. 이것은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이 타자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의 열림과 닫힘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9:45에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열림과 닫힘이 우리 주님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이 밝아진 동기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30-31절 말씀을 보시면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라고 했습니다. 식사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낯선 타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떡 곧 예수님의 몸을 진정으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실 때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갑자기 눈이 열려진 것이 아닙니다. 32절에서 그들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길을 걸으면서 그의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32절을 보시면 “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굳은 마음에 말씀이 들어갈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굳었던 마음의 벽이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의 시대를 보면 너무도 냉정하고 너무도 차가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Mega Death 시대라고 합니다. ‘메가’라는 말은 핵폭탄의 폭발력의 단위로 1메가는 100만 명을 죽일 수 있는 단위입니다. 곧 이 시대가 “떼죽음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어도 한 두 사람 죽는 것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수십 명씩 죽어야 그제야 사람들의 눈길이 그곳에 쏠립니다.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따뜻함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신앙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들락날락하지만 굳은 마음이 녹을 줄을 모릅니다.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회개할 줄 모릅니다. 그저 왔다 그저 돌아갑니다. 로마서 12:11에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 했습니다. 열심이란 뜨거운 마음을 말합니다. 뜨거운 마음이 있을 때 신앙이 열립니다. 뜨거운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뜨거운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움 가운데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 보이시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즉 두려워하고 의심하던 마음이 열렸습니다. 전적인 신뢰와 깨달음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있어왔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한마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행동에 대해 늘 깨닫지 못하고 무지했던 제자들이 비로소 성경의 예언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해하게 되는 극적인 순간을 맞게 되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마음이 말씀에 귀기울이기 시작할 때 뜨거워지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남 같이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그때에 부활하신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셜록 홈즈라는 탐정소설 작가인 코난 도일이 배를 타고 여행을 하던 도중이었습니다. 하루는 자기 선실 밖 갑판에서 일을 하고 있던 한 선원이 어떻게나 심하게 하나님을 모독하며 욕을 퍼붓던지, 선실의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 선원은 웃통을 벗어젖힌 채로 있었는데, 온 몸이 문신으로 덮여있어 대단히 볼만 했습니다. 그것도 전부 종교적인 그림의 문신이었습니다. 색깔이 멋지게 칠해진 큰 십자가, 가시 면류관, 물고기 표시 등 기독교적인 그림들로 그의 몸뚱이는 온통 문신이 되어 있었습니다. 코난 도일은 이것을 예로 들어서 현대의 기독교를 비꼬았습니다. “ 오늘날의 기독교란 그 문신을 가진 사람의 경우처럼, 겨우 살갗 깊이 정도의 신앙밖에는 안 된다.”겉으로만 신앙의 모양을 갖춘 상태로는 안 됩니다. 내 심령 깊은 곳까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변해야 합니다.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려 새롭게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 열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열린 신앙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약속하신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깨닫게 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으시고자 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단걸음에 예루살렘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증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였고, 그 의미를 성경을 근거로 하여 깨닫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게 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48절에서 긴급한 지상최대의 명령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진정한 믿음을 소유합니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 믿음의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가짐과 영적 상태로 인생 길을 걷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해 여러분의 마음이 열려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마음을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 여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찾아 오셔서 약해진 무릎을 일으켜 세워 주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이 되기 바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다가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던 것처럼 저희들의 마음도 열어주사 열린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져 우리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하옵시고, 주님과 늘 동행하는 저희들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