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4일 주일설교동영상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장 1-1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가서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입구 가까이에 서 있는 높은 탑입니다. 그 탑에 가까이 가서 보면 충격적입니다. 1970년대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 킬링필드에서 살해당한 수많은 이들의 해골이 그 탑 안에 가득 채워져 있어서입니다. 그 당시 무려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고 해요. 전 국민의 3분의 1이 그리되었으니 살아남은 캄보디아 사람들 안에 상처가 참 크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망이 그들의 삶을 뒤덮었던 것이죠. 오랜 세월이 흘러 회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그 상처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요. 캄보디아를 절망에 빠뜨렸던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책임을 단지 몇 사람에게만 전가하고 잔존세력들은 여전히 호가호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캄보디아뿐 아니라 어느 곳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절망을 덮고 갈 뿐이지 절망에서 사람들을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생존자가 얼마 남지 않은 위안부 문제, 세월호 사건, 일년에 2000명이 산업 현장에서 재해로 죽는 문제, 아동학대와 같은 절망, 상처, 고통, 죽음으로부터의 온전한 회복은 요원한 일처럼 보입니다. 실은 타락한 세상과 사람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수많은 뼈처럼 이런 많은 문제들은 인간 스스로는 넘어설 수 없는 깊은 절망을 보여주는 것이죠.
주전 6세기 경에 이와 같은 극한 절망 앞에 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때 같이 끌려간 에스겔이었습니다. 그는 주전 593년 바벨론에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에서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누구도 그렇게 될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결국은 환상대로 예루살렘은 처절하게 망하고 맙니다.
멸망 이후 선지자 에스겔은 어느 날 하나님의 영에 의해 또 다른 절망의 현장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마치 킬링필드와도 같았습니다. 골짜기에는 사방으로 뼈가 가득했습니다. 이때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후 얼마 안 되는 시기였으리라고 추정합니다. 에스겔은 직감했을 것입니다. 골짜기 지면에 가득한 심히 마른 뼈들이 자기 민족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뼈들은 죽어 매장도 되지 못해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한 저주받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뼈들로 가득찬 골짜기에 섰을 때 에스겔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착잡한 심정으로 뼈를 바라보고 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묻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도 하나님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아니요” 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직면한 많은 일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상황들이 많은 겁니다. 그러니 에스겔이 얼마나 난감했겠어요. 그래도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그 답은 자명한거예요. 어떻게 죽어 오래 되어 아주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에스겔은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불가능을 넘어 뼈들을 살릴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에스겔은 하나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겁니다. 신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곤란한 질문을 하시면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앞으로 에스겔처럼 대답을 하시면 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심히 마른 뼈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을 살리는 장면을 보면 대부분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많아 봐야 사흘 정도 지난 시체들을 명하거나 만져서 살린 것이지 말라 비틀어진 뼈를 보고 살아나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지금 이상한 퍼포먼스를 하시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작 들어야 하는 마른 뼈들이 곧 이스라엘 온 족속임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목적입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이 뼈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하셨습니다. 11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들은 처참하게 바벨론에 의해 유린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눈이 뽑힌채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많은 이들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모든 것이 무너져 탄식하였습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그들은 골짜기 가운데 가득한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라버린 뼈와 같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마른 뼈와 같습니까? 소망이 없습니까?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라고 여겨집니까? 지금 그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마음의 귀를 여십시오. 이스라엘은 그들이 망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처절하게 멸망했던 것이죠.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말라버린 심령을 향해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회복될 수 있으리라고 우리에게 속삭이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직면한 절망을 더욱 깊어지게 할 뿐입니다. 오히려 회복불능의 상태로 몰아갈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통신라인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마른 뼈 이스라엘을 향해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습니다. 5절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절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전히 생기가 없었습니다. 단지 죽은 시체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명하셨습니다. 9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마지막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서의 생기는 하나님의 루아흐, 호흡이요 숨입니다. 그 생기가 들어가자 마침내 죽었던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극히 큰 군대였습니다. 10절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제2의 창조역사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자 생령이 되었던 것처럼 사망과 절망의 자리에서의 회복은 하나님의 호흡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연결이 오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14절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은 비록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은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소망 없는 무덤 속에 있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은 무덤으로부터 나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12절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무덤을 나와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13절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덤으로 가도록 심판하셨고, 그 절망의 무덤을 열고 거기에서 나오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인줄을 알리라”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목적하신 것입니다. 70년 포로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많은 영적 작업들을 하였습니다.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70년의 시간을 무덤과 같은 속에서 보내고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14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말씀하시고 이루셨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 삶의 회복은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앎으로써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아가 그 구체적인 행동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며, 실제적으로 성령님과 연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진정으로 무덤에 있던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나오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심판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까? 믿고 잘 안다고 하면서 왜 절망하십니까? 왜 한탄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외쳤던 것처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이 되었다” 고 왜 여전히 탄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너희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힘들어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소리, 자기감정에 몰입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실은 하나님 말씀을 전혀 듣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어떤 회복의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끝까지 마른 뼈로 살아갈 것입니다. 말씀하심으로 인해 그 뼈에 살이 붙고 힘줄이 생기고 하나님의 호흡이 불어져야만 합니다. 왜요? 마른 뼈가 스스로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어서입니다.
“너희가 살아나리라” 말씀이 우리 귀에 선포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심령이 말씀을 청종해야만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회복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가 무덤에서 나오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절망이 그쳐지고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망으로 모든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한 헤, 회복의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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