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0일 주일예배
[마음의 할례: 신 30장 1-1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지난 며칠은 생후 16개월의 짧은 생을 살다간 한 아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아이를 생각하며 슬퍼하였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아이를 학대한 상황에 더해 아이를 입양한 부부가 유수한 기독교 대학 출신이고, 목회자 가정의 자녀들이었다는 사실이 이 비극을 접한 사람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이 두 사람에게 수십 년간의 신앙교육은 무의미했던 걸까요? 상세하게 내막을 듣다 보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목사로서 마음이 저며왔습니다.
방송 매체를 통해서 들려오는 기독교인들의 일탈은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악의 모습은 초대교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였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이 땅에서도 경건의 내용은 없고 모양만 갖춘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버젓이 활보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귀한 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눅 18:8b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스라엘을 보세요. 그들이 멸망하기 직전에 참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지도자 집단에서 보면 선지자 예레미야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70년 포로 생활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나머지 종교지도자들은 예레미야를 배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했지만 모든 것이 거짓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바른 선지자를 오히려 반역자로 몰아갔습니다. 그런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 의해 망했고, 70년의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그때서야 깨닫습니다. 왜 인간은 파국을 맞기 전에 깨닫지 못하고 꼭 망하고 나서야 후회하고 그때서야 하늘을 바라보는 걸까요?
신명기에선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0: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신명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단호하게 선언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은혜가 영원할 거로 생각하는 건지 함부로 행동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기독교 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건 만용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지만 우리는 그 은혜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죠.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안타까운 것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건 달리 말해서 가짜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가짜들이 교묘해져서 진짜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나 사람은 분간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분간하십니다. 삼상 16:7b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결국 사람들도 열매로 그가 가짜라는 것을 나중에는 알게 되겠지만 그 사이에 그 우매함으로 인해 많은 상처가 남습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유대인의 상징으로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징표였습니다. 창 17: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베어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모든 죄악 된 것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외에 의지했던 모든 것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런 중요한 할례이기에 광야 40년을 보내고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 들어가기 전 출애굽 2세대가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못했다가 중대한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는 할례를 했습니다. 이건 전쟁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전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출발할 때는 이와 같은 행위들이 그 가치와 의의를 잠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한 행위와 상징이 가치와 의의를 넘어서 그것 자체가 중요하게 되어버리고 그것이 마치 정체성인 것처럼 호도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바울은 명료하게 집어내고 있어요. 롬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겉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참 유대 사람이 아니고 몸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가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속사람이 유대 사람이라야 참 유대 사람이며 문자화된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인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표면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례받았다고 해서, 예배에 참여한다고 해서, 교회 멤버쉽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거예요. 마음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에 할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마음에 할례를 베푼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어떻게 마음을 베어내라는 것일까요? 마음의 할례는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인드 컨트롤의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모세는 그 일을 분명하게 선언하였습니다.
신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마음의 할례는 육체의 할례와 달라서 외적인 표시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까지 동반합니다. 그래서 굳이 하나님의 율법이 강요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열의로 하나님의 법을 능동적으로 지키게 하며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이는 마음의 할례가 곧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마음에 할례를 베풀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오는 것입니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는 강퍅한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 즉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리적이고 내적인 절제를 통해서 우리는 죄의 문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로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적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겉사람의 할례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고, 자신의 표면적인 기준이 단순하게 율법과 교회 통념적인 기준치에 도달하거나 넘어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자신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사탄은 여전히 그 마음을 공략할 것이고, 자신들이 은밀하게 행하는 행동들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영적으로 점점 더 둔감해지면서 아이를 학대했던 두 사람처럼 괴물이 되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 행동의 댓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이렇게 은밀하게 죄를 짓고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은밀한 죄가 자기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며 우리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다는 점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꼭 상황이 종료되어서 깨닫거나 불행하게도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자기기만은 은밀한 죄의 특징입니다. 어리석게도 은밀한 범죄자는 그 일을 하는 것이 결코 두렵지 않고, 누구도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것이 다 악한 결과로 직결될 것인데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을 둔하게 하고 판단을 비뚤어지게 만듭니다. 우리의 사고를 타락시키고 가치관을 왜곡합니다. 죄는 교묘하게 매력적인 모습을 하고 자신을 과시합니다.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이 해를 입습니다. 사랑받아야 할 아이가 무수히 학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언어폭력, 성폭력, 수 없는 갑질에 많은 이들이 희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은밀한 죄의 폭주에 대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합니다. 긍정의 이야기, 복의 이야기를 멈추고 우리 죄의 실상이 드러나고, 우리 내면의 모든 강퍅함이 성령의 불로 베어져 나갈 때 내적 회복이 이루어지고 참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가운데 거룩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통한 회복을 위해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 위에 다시 서고, 성령의 역사함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야 합니다. 베어짐에는 고통이 당연히 수반 될 것입니다. 그걸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의 강팍한 암적 덩어리들을 베어내셔야만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보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 여호와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회복하시고 풍성한 복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신 30:9-1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아멘!!
2020년을 힘들게 지냈습니다. 2021년 여전히 코로나 19의 거대한 벽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 시대의 암울함 앞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내적 회복을 통해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을 향한 전진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시간들을 털어버리고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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