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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부르심의 목적: 엡 3장 8-13절

by 최수근 2020. 11. 22.

2020년 11월 22일 주일예배

[부르심의 목적: 엡 3장 8-13절]

최수근 목사(에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종교개혁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한 담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중세 카톨릭의 교권 아래서 소명은 세상을 등지고 수도사의 삶을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뜻하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명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라는 부르심이 아니라 일상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일에 대한 소명까지 확장이 됩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개신교 또한 그 부르심의 목적을 점점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으로의 파송,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삶이 퇴색되어 있습니다. 물론 위기 때마다 교회들이 신앙적 개혁을 통해 위기 상황을 극복해 나가곤 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많은 이들이 어떻게 신앙적 회복을 이룰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지만, 내적인 개혁 운동의 물결은 미미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많은 영역에서 미국교회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복음적이고 동시에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도 받았지만, 중앙대 김누리 교수가 이야기하는 미국의 야수 자본주의, 물질주의의 심각한 영향 또한 받았습니다. 한국교회가 유독 교회와 개인의 외적 부흥에 지대한 관심을 두는 이유입니다. 그로 인해 신앙 본질의 문제는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코로나 19로 직격탄을 맞고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부르심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는 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곧 그리스도인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 교회를 향해 부르심의 목적을 선포하고 있는 바울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도전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에베소서 38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표현은 도저히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없던 자라는 자신에 대한 평가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를 통해서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삶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그는 그 일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목숨을 바쳤고 마침내 그 일로 인해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신 목적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자에서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전하도록 그를 은혜 안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자각이 그에게 있었던 거죠. 우리가 바울처럼 정녕 받은 은혜의 가치를 깨닫는다면 우리 삶을 바라보는 패러다임, 삶의 우선순위 등은 새로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목적이 우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우선되어질 때 우리는 신앙의 길에서 역주행이 아니라 정주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목적이 이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흘러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그리스도가 선포되도록 하고 보여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풍요를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측량할 수 없는 풍요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생명이요, 그분의 능력이요, 그분의 성품이요, 그분의 말씀이요, 그 분의 임재요..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삶의 영역에서 한없는 분이십니다. 그 어떤 제한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3차원의 시공간 안에 갇혀 있는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한대의 풍성함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풍요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풍요를 그의 아들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그래서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진정으로 한 인생에게 흘러가면 그 인생이 극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못하는 것이 기적인 거죠.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오늘 나를 통해서 흘러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로부터 공급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초점을 흐트러뜨리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집중하고 예수님을 전하십시오. 다른 부수적인 작은 복, 물질적이고 환경적인 번영을 버리십시오. 내가 믿는 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를 보십시오.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증거 한 바울과 사도들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분명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에베소서 39절 말씀입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시대에는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이 세상 가운데 밝히 드러났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1-2장에서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을 들어내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새롭게 세우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게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놀라운 역할을 수여해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10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흘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로 천사들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아가며 심지어 하늘 영적 세계의 존재들에게까지 메시지를 갖고 있는 유일한 곳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아무리 약하게 보여도, 세상의 지적을 받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그와 같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공적인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 땅의 교회들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메시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311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비밀이신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구원의 경륜은 즉흥적이고 도발적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행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은 갑작스럽게 추진된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준비되고 실행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이 세상에 있는 전 생명을 위해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은 세상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로움으로 발원된 우주적인 구속사의 그림입니다. 영원부터 오늘날까지 한치의 오차없이 진행해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 놀라운 그림을 교회는 세상을 향해 지속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 만연된 가치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기독교 메시지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형편없는 것으로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의 연합 가운데 존재하는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힘은 놀라운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힘입어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광휘 앞에 두려워 설 수 없던 타락한 인간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비정상적인 삶의 궤적에서 정상적인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본래 창조하셨던 것처럼 보시기에 좋았던 그 자리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으로의 회복입니다. 그곳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리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그렇게 바울의 부르심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바울은 그 소명을 완수하였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그 부르심에 충실한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13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의 투옥은 그의 부르심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를 바라보는 에베소 교인들은 낙심했던 거죠. 현 상황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낙심하지 말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이것이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어떻게 이런 일이 그들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하나님 나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에서 야기되는 많은 일들로 인하여, 그중에는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만 못한 어렵고 힘든 상황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바울은 부정적인 면을 보지 않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받는 고난은 영광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17절에서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의 고난이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이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예상될 수 있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피하지 말라는 것이죠. 오늘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음성을 우리가 바르게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못 해석해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자리, 편안한 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정작 진정한 은혜를 상실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환경적이고 물질적인 번영이 최종적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죠. 복음을 여기에 국한 시킬 때 우리 신앙의 토대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항상 가이드 라인이 분명해지거든요. 잘되면 은혜이고 잘못되면 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싸인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원망 불평합니다. 

복음의 목적 위에 바로 서 있을 때, 복음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래서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드러나고, 선포되고 보여질 때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함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 동행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놓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도록 하신 그 풍성함을 바라보지 못한 채 세상의 제한된 영역 속에 갇혀 불행한 신앙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 복음의 혜택이 나에게서 세상으로 흘러가 세상이 본래 창조하신 세상으로의 회복에 있음을 알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삽시다. 

나아가 세상을 향한 복음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소유하고 이곳에 서 있는 예수생명교회가 됩시다. 그것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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