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7일 주일예배
[내 인생의 풍랑을 두려워말자: 막 4장 35-41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평온이 깨어지고 매우 급박한 자리, 삶에 격랑이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순간입니다. 평소에 의젓하고 듬직한 줄 알았는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신앙이 좋은 줄 알았는데, 위기 앞에 직면해서 그간에 보여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그간에 갖고 있던 이미지가 깨어지고 맙니다. 당장은 감정에 요동쳐 아무 생각도 없이 막 행동하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후회막급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날도 사람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날이 저물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리 호수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났습니다.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제자들은 위기상황에 빠졌습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밤이 되면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자주 풍랑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작은 풍랑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풍랑은 전에 제자들이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수없이 겪었고, 또 이겨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 앞에 몰아치는 풍랑은 광풍, 메가 폭풍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풍랑이었습니다. 천둥이 치며 엄청난 양의 비를 동반하고, 풍랑의 위력도 제자들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제자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동안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배의 고물, 뒷부분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피곤하셨던 걸까요? 풍랑으로 배가 요동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곤히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당황하였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전혀 반응 없이 주무시고 계시니 마음이 다급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부르짖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의 울부짖음은 사실 간청이라기보다는 자기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향한 절망과 분노의 표현처럼 들립니다. 제자들은 두렵고 무섭고 게다가 아랑곳 하지 않고 주무시는 예수님 때문에 짜증이 난 겁니다. 뒤에 막 4장 40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질책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의 부르짖음의 어조가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이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바다의 풍랑에 경험이 많은 제자들은 왜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깨우며 자신들이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한 걸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지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해결사로 보았던 겁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떤 방식이든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이죠. 여기에서부터 그들은 잘못 생각했고, 잘못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했듯이 이번에도 뭔가 해결의 방법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단지 우리의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문제가 드러나면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통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때 그때 대응하는 분이 아니라 구원역사의 큰 그림을 가지고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앞에서 나의 이익이 흔들린다고 해서, 나의 안전이 흔들린다고 해서 방방 뜰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함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풍랑에는 틀림없이 무슨 뜻이 있겠지? 우리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을 신뢰함이 진정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거친 풍랑에도 일어나지 않으시던 예수님이 살려달라는 제자들의 고함소리에 깨어나셨습니다. 아니 어쩌면 먼저 깨어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제자들이 어찌하는지 모른채 하고 누워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일어나시어 아우성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바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람을 향해 꾸짖으셨고,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자다말고 갑자기 일어나서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외치는 예수님을 보면서 순간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참으로 불경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예수님이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은 아니신가?”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배를 집어삼킬 듯이 일렁거리던 바다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제자들이 놀라 벌어진 입을 닫지 못하고 있을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이 말을 헬라어 원문에 따라 더 정확히 하면 “너희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서 이때쯤 되면 예상 되어지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야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마땅히 열매가 없을 때 우리는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를 보시면서 열매를 찾았을 때 열매가 없었던 부분도 그와 같습니다. 무화과는 다섯 번 열매를 맺는데 첫번째 열매가 파게가 있고, 그 이후로 나오는 열매를 테에나라고 합니다. 파게가 없으면 테에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시기에 있어야 할 열매, 파게가 없었기에 그 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과실수는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지적하면서 그들에게서 믿음이 없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왜 그렀습니까? 그것은 폭풍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으로 인해 두 가지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신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그들을 돌보실 것이라는 확신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갖고 있는 두려움은 아무리 사나운 폭풍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역사하실 거라는 그들의 믿음이 실상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제자들은 당황하고, 반면에 이러한 확신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동안에 그냥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의 침착함 속에는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평안히 주무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믿음, 이 확신만 있으면 어떤 위기 앞에서도 차분하게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신앙 부족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고난 속으로 주님과 함께, 주님을 신뢰하며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지금 그 길은 제자들이 가자고 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신 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분과 함께 한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안전함을 담보하는 것임을 알고, 담대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길이라도 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고난에 동참하기를 무서워했습니다. 나중에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은 영락없이 예수님 주변에서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이것은 신적임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폭풍 앞에서 누리는 공포와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막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질문을 서로에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질문은 폭풍의 위험에 대한 제자들의 두려움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부재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4:41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제자들의 반응은 실제로 예수님의 질문에 부정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고백이 나와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수군거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 입술의 고백과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서 광범위한 문제들이 들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번 여정을 통해 예수님은 세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의 믿음을 점검하기 위한 예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둘째,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셋째, 제자들을 견고하게 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동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히 12장 28절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그러나 아직도 제자들은 두려워할 뿐,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게 하는 분이 과연 누구인지 그렇다면 이분은 과연 누구냐 하고 묻고만 있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불신앙은 그리스도인이 겁과 두려움, 불안에서 벗어나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 위험을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대하여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불의에 맞서 싸웠던 교회는, 크리스천들은 이웃과 위험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믿는 사람은 고난의 어둠 속으로 예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히 13장 12절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장 13절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렇게 해서 믿음의 사람은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절망의 자리가 아닌 희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가는 성도들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시련과 고난 중에서도 든든한 보장이 되시며 신뢰할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로마 시대 신앙의 핍박 하에 있었던 그의 독자들에게 강하게 확인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박해 상황에서 견딜 수 있는 길은 예수님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풍랑 이는 현실의 바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지 않으면 우리는 누릴 수 있는 너무나도 고귀한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을 모시게 될 때 이전에 우리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두려움이 되지 못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 주님은 우리와 그 속에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승천하시면서 예수님은 그 점을 약속하셨어요. 마 28:20b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의 편에서도 우리를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주변을 둘러보면 나라도, 개개인의 삶도 녹녹치 않습니다. 작금의 상황이 어디로 갈지 예상할 수 없는 지극히 불안한 상태에 서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과 함께 가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미친 듯이 달려들지도 모르는 광풍들을 멈추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도 뜻이 있습니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크기가 어떤지를 살펴보시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어떤 일들을 펼쳐가실지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옛날 제자들처럼 자신들의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제자들이 아닌, 고난의 풍랑과 맞서 싸우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또 다른 제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삶을 살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어깨 위에 다른 사람들을 중보하고 나갈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난의 자리로 나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끌어안고 그들을 위로하고, 고난과 싸워 극복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삼아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또한 즐겁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영원한 인도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앞에 밀려오는 풍랑 앞에서 결코 작아지지 맙시다. 두려워 하지 맙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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