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1일 주일예배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사 12장 1-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곳곳에 함정이 있습니다. 안전하리라고 확신하여, 혹은 대박이 날 것이라고 예상하여 선택했는데, 모든 것을 앗아 가버리는 블랙홀같은 경우들입니다. 인간의 눈은 허무한 것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욕심이판단을 흐리게 만들어서입니다. 세상은 그런 허점을 파고 들죠. 사회에 사기꾼이 넘쳐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이 달라지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주 되시지 않고, 다른 것들이 주가 된다면 언제나 우상을 섬길 위험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이 체질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겁니다. 삶에 우선 순위를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를 참 힘들게 합니다. 막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도 현세적인 필요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가고자 하는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오해를 해서입니다. 실은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자기가 믿고자 하는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루어주신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느낄 수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우리들이 그간에 행하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으리라고 믿어요.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이 무엇인지를 진정 깨닫는 시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고백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구원 이전에 자신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 시간이 너무도 오래 걸렸고, 그래도 또 다시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우리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끝은 결국 사망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자기의 죄인됨이 먼저 인정되어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복음을 이야기하며 인간의 죄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노 가운데 있었는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신 거예요. 심판을 그치시고 구원의 기치를 높이 드신 겁니다.
1절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그 날에”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실 때를 지칭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남은 자들의 회복에서 일차적으로 이루어지죠. 그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한 구원의 역사와 종말론적으로 마지막 날에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구원역사를 시간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을 떠나 수시로 우상 숭배를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심판은 열강이라는 막대기를 들어서 행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고, 70년의 포로생활까지 겪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단절,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알게 된 거죠.
우리도 첫째 사람 아담의 범죄 안에 서 있었습니다. 로마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나프”라는 단어는 “격노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모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왜 진노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화풀이로서의 분노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대응입니다. 그 분의 거룩하신 성품에서 솟구쳐 오르는 절대적 의에 기초한 감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신 심판자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창조주로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아버지의 자리에서 그 죄의 문제를 친히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죄로부터 해방은 우리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메시아의 약속 또한 단순히 열강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치유와 회복, 구원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그 날” 이라는 종말론적인 회복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우는 길은 돌이켜 회개하고, 거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여호와의 분노가 사라진 가장 중요한 요인은 메시야의 구속 사역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는 속죄를 위한 피흘림이 있으며, 그것이 곧 여호와의 분노를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항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주의 진노가 돌아선 결과, 심판은 멈추고 그에 따른 고통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의 안위하심으로 나타납니다. “나함”이라는 말은 위로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예수님을 믿기 이전 우리는 죄의 위협 가운데 있었고,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최초의 범죄 이후에 겪은 심리적 상황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숨었습니다. 이것은 아담 이래로 똑같습니다. 죄 짓고 두 발 뻗고 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인간들이 매우 완악해져서 그런지 사람을 죽여놓고도 잘 자는 것 같아요. 세상이 더욱 무서워졌습니다.
죄인 앞에 선 십자가의 역할은 바로 그런 두려움, 완악함 등을 내려놓게 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십자가에 초청받은 우리는 이 모든 위협,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지는 즐거운 교환입니다.
그렇게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이들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하며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지속적인 찬송과 감사는 구원의 은총을 입은 인간들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입니다.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하나님께, 오직 예수 그리스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다른 이름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위기 앞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고, 애굽을 의지하다가 파멸의 길에 들어선 것을 기억합시다. 그들은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 만이 구원이시구나”
우리는 이것을 깨우쳐 알기 위해 수업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심을 선포하고 그 안에 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심을 믿고, 더이상 앗수르를 찾지 말고, 애굽을 찾지 맙시다. 다른 수많은 거짓 된 우상을 믿지 맙시다.
매 순간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을 믿으십니까? 구원자이신 주를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할 때 비로소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주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 분이 나의 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홍해 앞에서 그 분의 능력을 경험하였기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었던 거죠.
여전히 우리가 수많은 위협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음을 발견한다면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며, 나의 노래이며, 나의 구원되심을 믿고 그 구원의 기쁨 가운에 서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사탄에게 빼앗기지 마십시오. 3절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물러날 때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단지 압제와 두려움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내어주심으로 우리는 영적인 생명과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영적인 생명과 풍성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0b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 때 매일 우리의 입술에는 감사와 찬양이 머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날을 완성하셨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길이 참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롬 3:25b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알았습니다. 심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야말로 하나님이심을 믿고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70년의 정화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된 이들은 그 과정에 대한 어려움으로 인해 불평하고 힘들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고, 그 분의 이름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높여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로 설 수 있었던 거죠.
4절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까?
5절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우리를 위해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전부를 내어주진 거죠. 그것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오늘 누리고 있습니다. 6절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셨고, 오늘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 분은 크고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크신 주께서 우리의 산성이 되어주십니다.
요즘 아동학대, 학폭 등으로 인한 가슴아픈 일들을 참으로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과 같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같이 있어 불편한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렇게 수많은 관계가 어그러진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가족이 같이 한다는 것이 행복이어야 하는데 불행으로 여겨집니다. 사회는 더더욱 따뜻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경쟁과 따돌림이 있습니다.
물론 따뜻한 공동체, 가정이 자리하고도 있지만 영원히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자리는 저 세상의 자리가 아닌 바로 임마누엘의 자리임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그리고 임마누엘의 삶에 서 있다면 우리는 매 순간 슬픔과 두려움, 불안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나와 함께 하는 주님이 나의 구원이시고 노래이시고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동행은 세상 끝날까지 영원한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끝자락까지 그리고 죽음 너머까지도 함께 하시는 주님 안에서의 영원한 동행이 여러분에게 위로와 격려, 큰 힘이 되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자 되심을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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