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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이중적인 그리스도인: 마 23장 1-12절

by 최수근 2023. 12. 10.

2023년 11월 5일 주일예배

[이중적인 그리스도인: 23장 1-1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거짓말쟁이, 위선자, 나쁜 짓 한 사람 이 세 부류 중 누가 가장 비호감일까요? 그게 그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걸 실험해 본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질리언 조던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사람은 위선자를 다른 두 부류보다 더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말을 하고 타인의 잘못에 엄하지만, 뒤로는 정작 자신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타인에게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고 쉽게 비도덕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지만, 자기의 잘못은 교묘히 숨겨 비판을 피해 가고 도덕적이라는 평판을 부당하게 유지하곤 합니다.

이렇게 주변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유지해오다가 어느 날 도덕적이고 법적인 결함이 드러났을 때 그가 잘못한 것에 대한 분노에 더해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라는 데서 오는 충격이 큽니다. 평소 도덕성을 강조하고 불의를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라면 속았다는 충격이 훨씬 크겠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비난의 매를 맞는 경우도 기독교인들에게서 위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요즘 세상은 무엇을 이야기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의 진정성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산 결과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이중적인 모습, 위선의 모습을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시대마다 개혁을 통해 신앙과 삶을 바로 세우려는 여러 도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1세기의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도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예수님은 그들의 거룩한 가면을 벗겨버리셨습니다. 몇 차례 논쟁을 마친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그 유명한 화 있을진저 시리즈를 이어가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진단하시면서 본 큰 문제는 자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있음을 보셨던 겁니다.

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문제는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앉는 경우 발생하곤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제 모세의 자리, 그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모세 율법을 해설하는 자의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렇다고 해도 율법을 해설하는 자에 걸맞은 지도력과 삶을 보여주어야 거기에서 권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앉아버리기에 늘 우리 주변에 비극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리를 늘 돌아보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리에 앉아계십니까? 설령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에 앉아있다면 그 책임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모세의 자리에 앉고 싶다면 모세와 같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에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비난받은 이유는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토라를 해석하는 전문가이고, 바리새인은 신학적인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막중한 자리에 있으면서 자리의 유익함은 누리려고 하면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결격 사유들을 예수님은 그들의 다섯 가지 특성을 들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이 따르기를 기대하는 율법적인 선언을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도움을 전혀 제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걱정하고 고민하고 그로 인해 두려워하게 했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신령하고도 영적인 유익은 주지 못한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진정성의 상실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그건 위선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철저히 이중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기독교 지도자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언제나 자리할 수 있는 위험들입니다. 이들의 이런 위험성을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고발하셨습니다.

첫째로 이들에게서 나타난 위험은 말 따로 행동 따로에 있었습니다. 요즘 말따행따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나 말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힘이 실리려고 하면 행함이 뒤따라야 합니다. 말과 행함의 엄청난 틈이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입니다.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면 저는 분명 거룩한 혁명이 일어나리라고 믿습니다.

둘째로,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우도록 했지, 자기들은 손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무책임합니다.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무겁고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짐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의적으로 만든 613개의 세부 율법을 말합니다. 이러한 율법 조항은 보통 사람들이 지키기에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유혹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그 일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실 때 의도하지도 않으신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만들어 내 세분화시키고 엄격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단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그 무거운 율법을 지킬 것을 강요 함으로써 사람들의 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자체를 추구하는 것을 정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되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잘못된 태도와 관습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들의 방대한 의무는 성경보다도 훨씬 더 짐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더 규정이 첨가됨으로써 전체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다면 랍비들도 그 짐을 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제도에 헌신하다가 하나님의 역사를 놓쳐버렸습니다. 율법을 주신 취지는 잊어버리고 문자를 쫓아간 결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으나 자신들의 삶에서 나오는 모범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저들이 율법으로 부과되는 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짐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소위 종교 권력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도 아니고, 신앙적 삶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 사람들은 자기를 과시하기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잘못 대변하는 경건의 공개적 연출로서 나타났습니다.

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드러내기 좋아하다 보니 작위적인 행동들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소위 투 마치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삶의 패턴을 구현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에게로 관심을 끌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리를 드러내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은 삶에서 진정성을 갖고 살아내는 거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은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경건의 가식으로 넘쳐났던 겁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두드러진 옷을 입는 것과 종교적으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경문이나 옷술 같은 것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도록 하는 장치였지 그것이 자기의 경건함과 거룩함을 나타내는 표지는 본래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본질은 사라지고 비본질이 주가 되어 크게 하고 길게 하는 외형적인 것들이 그들의 경건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고 만 거죠. 이런 일들이 현대교회에서도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게 마치 경건의 모양인 양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런 것들을 보시고 감탄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어떠하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스타일이나 어떤 치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의 예배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치장은 사람을 의식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없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넷째로, 이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는 칭호와 존경받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23: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이들은 어디를 가나 상석에 앉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랍비” “아버지” “지도자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물론 이들이 랍비가 되기 위해서 성경을 알려고 세심하게 연구했고, 사람들이 아비의 능력에 의존하게 하는 돌보는 자가 되었고, 지도자로서의 가이드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섬김으로 그쳐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 이런 칭호 듣기를 즐겨하고자 한다면 결국은 하나님께 가야 할 영광을 자신들에게로 돌려 높임을 스스로 받는 일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교만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막고 계신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말입니다. 우리는 섬김는 자일뿐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선생님이요 영원한 지도자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이걸 깨지 못하니까 너희가 다 형제라고 했음에도 <하이라키 구조>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사역을 오해했습니다. 사역을 섬김의 기회로 보기보다는 경영의 영역 혹은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요 기회로 보았습니다.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이 언제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걸림돌입니다. 말로서는 이해가 되는 데, 처음에는 적용되는 듯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권력을 즐기는 경향이 사람들 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이고 진정성 없는 모습들이 주후 1세기의 유대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었을까요? 이런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만약 이 다섯 가지 길에서 실패한다면 이 길은 결국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순되고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펼쳐질 화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에서 고발되고 있는 이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행동을 통해서 이런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의 삶을 넘어서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이 지도자들의 거짓된 리더십을 경고하시고, 그들의 잘못된 모범을 따르지 말 것을 엄하게 명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모든 자리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용납하는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경건하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냄으로 그들에게 순종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지배와 누림의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자리는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자리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지시가 아닌 솔선수범이 이어지고, 자기를 한없이 드러내기보다는 우리를 통해 예수님께서 드러나기를 기뻐하게 될 것이고, 우리 주님처럼 진정으로 섬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보여준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세상 통치자들의 모범을 따르는 리더십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중요한 목표는 당연히 권력과 권위를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와는 다른 모델, 종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상적인 종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호하고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대해지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야망을 갖고 있기에 세상 나라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서 살 수 있는 순간을 그들에게 제공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각각의 위치에서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사람들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이룰 수 있도록 모든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야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종의 겸손한 역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아들과 딸들로서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들을 향해 우리 주님은 선포하실 것입니다. “복이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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