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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암울함을 넘어 소망으로: 하박국 3장 16-19절

by 최수근 2024. 1. 6.

2023년 11월 19일 주일예배

[암울함을 넘어 소망으로: 하박국 3장 16-1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한국 사회는 학력, 학벌, 연봉, 지위, 자산 등 사람들이 달성해야 한다라고 여겨지는 사회적 기준들이 너무 높습니다. 과도한 경쟁 사회에 대한 해법으로 '모두가 동등한 주체로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제시되기보다는 이 안에서 나의 생존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 짓고 격차를 벌려야 한다는 방식의 담론과 실천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난제들을 단지 한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나아지지 않을 현실처럼 보입니다. 수십 년 동안 노력하고 일해도 '내 집 마련'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노동보다 부동산 투기가 돈이 되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자금이 없으면 이 일도 가능하지 않으니, 청년들이 주식 혹은 코인 시장에 뛰어들지만 개미 투자자의 생존율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공정을 외치지만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 불평등만이 난무하고 있어요.

이처럼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한국 사회의 소멸을 앞당기고 있습니다. 전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출생률과 전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정신건강 문제와 직결되며 자살 문제와 이어집니다. 10, 20, 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노인 자살률도 전 세계 최고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젊은 연령대의 자살률 증가입니다. 특히 20대 자살 원인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이 1위이지만 이것은 2위인 경제생활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극심한 취업난, 과로와 스트레스, 빈곤, 절망 그리고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사회적 상황들에 의한 희망 없음이 원인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한 번 실패하면 두 번째 기회가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제 모두를 죽이고 외롭게 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를 끝내고 인간중심, 생명 중심, 서로 돌보는 사회 만드는 것만이 인류의 소멸을 막고, 모든 세대의 자살을 줄이며, 고립 청년, 고립 노인 등 모두의 고립과 고독을 해소하고 누구나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시스템들이 마련된다고 해서 세상이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유럽의 부유한 나라들, 이런 법적 장치들이 잘 이루어진 그 나라들의 사람들은 과연 행복하고 감사가 풍성할까요? 우리에게 그런 나라가 부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완벽한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반쪽짜리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한 가지 실험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상을 잠깐 보겠습니다.

매일 100달러씩 아무 이유 없이 받은 사람들의 반응에서 어떤 것을 느끼셨나요? 처음에는 낯설어하였지만, 그런 행운을 실제로 느끼면서 엄청나게 감사해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이게 정상적인 겁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늘 받던 것을 받지 못할 때 튀어나오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게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 중에서 그 누림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환경에 익숙해짐으로써 우리 속에는 그 일들에 대한 소중한 마음들을 잃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것에 대한 감사보다도 다른 이들과 비교해 괜찮은 삶을 살고 있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는 때가 있어서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요?

우리의 시선이 물질적 가치관과 자본주의 논리 안에서 철저하게 이 땅의 것들에 얽매여 있다면 실은 달라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상황이 좋다고 여길 때는 잠시 만족할 수 있겠지만 그 속에서 슬그머니 다른 마음이 올라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엄청난 실수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당연하게 여겨지고, 어느 날 그렇게 당연하게 여겼던 그 자리가 무너지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뒤엎어진 그 자리로 인해서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화 중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참으로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하박국서의 마지막 부분인 316~19절은 비록 절망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위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절망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마음을 16절에서 표현을 합니다.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내 창자가 흔들렸고,” 선지자는 지금 온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공포에 떨고 있는 거예요. “내 입술이 떨렸다는 것도 하박국의 괴로운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게다가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는 표현도 뼈를 깎는 듯한 고통과 두려움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3가지의 은유적인 표현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심판 앞에서 무너질 때로 다 무너져버려 스스로 감당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보여주는 겁니다. 만약 이대로라면 모든 것은 끝난 겁니다. 남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말씀처럼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린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박국은 예전의 심판 때에처럼 하나님께서 다시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하시는 때가 올 것을 확신하지만 그때가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겁먹은 채로 있지 않고 이전에 행하셨듯이 자기를 만나주실 것을 확신하며 침착하게 기다립니다.

이어지는 17절에서는 바로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무엇이 이렇게 고백하게 한 걸까요?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앞선 16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궁극적 승리를 거두실 때까지 선민이 당해야 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나 17절 이하에서는 온갖 환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기뻐할 것이라는 현실의 모든 문제를 뛰어넘는 자신의 신앙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여섯 개의 짧은 문장을 통해 물질적 빈곤과 궁핍과 관련된 상황을 묘사합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흔한 나무들이지만 또한 매우 중요한 유실수들입니다. 이 나무들이 무성하지 못하거나 열매와 소출도 없다면, 게다가 밭의 먹을 것이나 양이나 소까지도 없다는 것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비참함 그 자체로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겁니다.

이처럼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때 사람들에게 가장 쉬운 길은 생의 포기일 겁니다. 지금도 이런 절망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렇게 절망스러운 상황 앞에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삶을 지탱해주는 모든 것들이 비록 눈앞에서 다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라고 그는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하박국은 앞에서 유대 사회가 유지되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포도나무와 같은 과수의 열매나 가축들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 상황을 나열하였지만, 그런 상황 중에서도 그를 지탱하는 진정한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정작 그 모든 것을 다시금 가능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있게 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물론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논밭의 곡식, 우리의 양이나 외양간의 소 등은 사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주체는 아닙니다. 하박국은 안 것입니다. 이것들이 없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이 없다면 그것이 죽음이고 절망임을 하박국은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의 생계를 위협하는 매우 궁핍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내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엇보다도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이 땅의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궁극적 구원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이중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절망 중에서도 결국은 그것을 이겨내고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나는 지금 무기력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힘 되신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나의 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헬리의 원형 하일은 하나님의 능력(59:11), 물질적 재산(31:25), 군사적 힘(삼상 10:26) 등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힘과 권세, 사람을 세우고 견고케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표현입니다.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근원적인 능력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기서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문제도, 어떤 역경도 근본적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참된 근원이심을 고백한 겁니다. 그가 의지하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어느 때, 어느 시,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의지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며 힘과 능력을 주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하박국은 포도나무나 양과 소와 같은 것들이 설령 없을지라도 오직 구원이요 힘이 되시는 여호와가 계신 것만으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거죠.

이러한 하박국의 상황과 형편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에 대한 확신은 전능자요,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모든 이들의 같은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에, 하나님의 성도를 향한 사랑이 확실하기에 그 어떤 위기와 어려움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고 그 어떤 대적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거죠.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시기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기소침한 자리에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기쁨 가운데서 활기차게 살아가도록 하실 것임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사슴은 험한 산악 지역에서도 민첩하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동물로 들 노루(삼하 2:18)와 더불어 민첩함과 날쌤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러기에 그 발이 사슴 같다는 것은 승리를 위한 교두보를 이미 확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장하여주실 것이니 의기소침한 자리에 빠져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높은 곳은 사실상 앞선 17절에 제시된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한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앞서 제시된 엄청난 역경과 시련을 충분히, 그리고 속히 극복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셨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실로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괴롭게 하는 모든 난관은 충분히 낙담할 만한 것, 절망스러운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련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문제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시련과 어려움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즐거움이 되시고 우리의 기쁨이 되시고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것을 확신했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본문의 신앙 고백적 진술을 통해 현실은 비록 암울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는 승리의 자리에 굳게 설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절망의 상황에서도 그 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거죠.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에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간에 개의치 말고 하나님, 우리의 구원되시고 힘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입니다.

믿음이란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박국이 24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 충실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 그 일이 좋은 일이든 설령 힘든 일이든 간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되고 우리 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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