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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화 있을진저: 마 23장 13-36절

by 최수근 2023. 12. 10.

2023년 11월 12일 주일예배

[화 있을진저: 마 23장 13-3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마치 과대망상 환자와도 같습니다. 과대망상은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과장, 과대평가하고 마치 그것을 현실인 것처럼 인식하는 정신 증상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특별한 알려지지 않은 능력이 있다거나, 매우 유명 인사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관계 안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매우 그릇된 관계이며 일방적인 관계로 보았습니다. 소위 스토커 수준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에게 임할 심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들이야말로 종교적 복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행복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드러나고 있는 매우 비참한 상태를 한탄하셨습니다. 이들에게서 자신의 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봅니다. 이 영적 무지는, 즉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지금 자기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저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서도 끊임없이 살펴보아야 할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를 살아있는 관계로 만드느냐의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실패한다면 우리를 보시며 주님이 탄식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치료 불가해 보이는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화 있을진저라는 강력한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감탄사인 를 나타내는 헬라어 우아이는 유감, 긍휼, 슬픔, 비난의 혼합된 애처로운 외침이고 저들을 향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겉으로는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화려해 보이나 내면은 죽어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슬피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화를 선포하신 첫 번째 이유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 하는 자까지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국에서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반대와 그들의 가르침으로 백성들도 천국 초대를 거부하게끔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건 나도 못 할 바에는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없도록 그 길을 원천 봉쇄하는 못된 심성의 발로입니다.

이들을 보면서 두 가지 상반된 질문을 던져 봅니다. “나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올바른 표지판인가?” 아니면 나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지 않는 왜곡된 표지판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표지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화에 보면 제대로 된 이정표를 가리고 엉뚱한 이정표로 상대를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오만함 때문에 잘못된 이정표를 정말 진짜 이정표로 믿어버렸던 겁니다. 그러니 남도 못 가고 자기들도 결국은 가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잘못된 확신 속에 달려가다 보면 무슨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두 번째 예수님의 화의 선포는 그 결과를 향하고 있습니다.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 안에서 자기들의 분파적 이해를 열렬히 따른 신봉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이 참된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요한 방법이라고 확신했고 그걸 따라야만 한다고 그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사람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개종자가 입교하면 그들도 결국은 자잘한 그들만의 율법적인 행동들로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하는 교만함에 빠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예수님은 녀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심히 아닙니다. 종교적으로 그럴싸한 자기 복제품을 만들어가는 바리새인들의 헛된 열심일 뿐이었습니다. 열정은 있지만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해도 그 열심의 끝은 사람들을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게 되는 겁니다.

이건 잘못된 모든 길에 서 있는 이들의 특징입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다른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만의 열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실제를 가르치는 인격적인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종교적인 위선이 삐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야 할 신실함과 정직함 아니겠어요.

세 번째로 예수님의 화는 이들의 잘못된 맹세의 모습을 향합니다. 이걸 옳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으니 이들은 눈먼 인도자일 뿐입니다.

23:16 “화 있을진저 눈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눈먼 인도자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너희가 말하되” 16절부터 22절까지 말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맹세의 문제가 불거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책임을 회피하려는 이들의 꼼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17-22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17-22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성전으로한 맹세와 성전의 금으로한 맹세, “제단으로 한맹세와 제단의 예물로한 맹세를 구분했습니다. 이걸 왜 구분했을까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실 때 이것은 하나님과 게임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중차대한 맹세의 문제를 가지고 종교적인 장난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위반하였습니다. 고르반 같은 경우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게임을 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신실함을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꾸민 제도를 발전시켜서도 안 된다고 하신 겁니다. 이 말씀은 어떤 물질적 대상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언제나 정직하게 행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맹세한 것을 지키고 못 지키는 것은 개인의 내면적 신실함이 문제이지 무엇으로 맹세했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화는 그들의 이중적 잣대를 향해 선포하셨습니다.

23: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의 중한 문제를 소홀히 했던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세부 사항에 대한 괴팍한 관심에 있지 않습니다. 율법의 우선되는 뜻을 순종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십일조를 드리라는 율법의 말씀에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아주 작은 식물이라도 십일조를 재어 드릴 정도로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보실 때 율법의 더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영역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이것을 버렸도다라는 표현까지 쓰셨습니다. 이건 참으로 어이없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율법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의 참된 목적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가져오는 것이지 종교적인 활동과 짐을 영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것을 망각하였습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자 예수님은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고 하신 겁니다. 율법에는 날개 달린 많은 생물들이 불결하다고 규정하고 있어요. 특히 하루살이 같은 경우는 발효과정에서 알을 까고 번식하는데, 그래서 이들은 포도주를 불결하게 만드는 작은 곤충들을 막기 위해서 채로 포도주를 걸러내 마셨습니다. 이 일을 율법을 지키기 위한 행동으로 적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율법적인 문제의 사소한 것들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더 큰 문제, 즉 의식적으로 불결한 낙타는 신경 쓰지 않은 겁니다.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았지, 정작 하나님이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던 거죠. 이것은 개인의 행동에서 모순을 보이는 위선의 가장 분명한 종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섯 번째 화를 선포하시면서 이들의 이중적인 삶을 비난하셨습니다.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이들은 외적인 의식적 정결을 요구하는 자신들의 정결법에 대단히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정결하지 못한 이들과 함께 식사하던 예수님을 비난했었고, 정결법을 지키지 않은 제자들을 비난했었던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더럽히는 것은 그 안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3:26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탐욕과 방종, 특히 종교적인 대중적 환호를 얻고자 하는 욕심은 외적인 행위에 영향을 주는 내적 동기입니다. 하지만 참된 정결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마음이 정결해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만이 가장 거룩하다고 주장하는 위선, 바로 그 위선의 뿌리는 교만에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의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게 하려는 욕심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욕심의 문제는 다른 한쪽 내적이고 도덕적인 이슈, 정의와 자비, 신실함을 놓쳐버리게 만듭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작은 모습이라도 겉과 속이 같은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이 정직함 아닐까요? 아닌데 그런 척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화는 다섯 번째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유대 사회에서 무덤에 회칠하는 관습은 그 지역을 잘 모르는 행인이 무덤을 접촉하여 칠일 동안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19:16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은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하지만 겉은 회칠하여 하얗고 깨끗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무덤 속은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죽음이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런 표현은 백성들에게 이들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같이 더럽혀지고 같이 죽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이들을 향해 겉만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 내면에 가득한 외식과 불법을 버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일곱 번째 화에 대해서 예수님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들에게서 교활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23:29-3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길을 돌이키도록 하셨지만, 이들을 핍박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대적했던 역사를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야 하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선지자와 의인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꾸미면서 자기들이 만약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들을 차별화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이들은 세례 요한의 죽음 앞에서도 침묵했었고, 나아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교활함을 보셨던 겁니다.

23:31-32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을 이들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아무리 아닌 척해도 결국은 본색이 드러나 하나님 나라를 대적할 것입니다. 며칠 뒤에 이들의 살인적인 분노는 이들도 역시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후손임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자들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맙니다.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사도행전 7장에서의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 유대교로부터 박해가 일어나면서 사도 외에 모든 이들이 흩어진 자들이 되어 복음을 들고 나갑니다. 그런 그들을 쫓아다니면서 박해하고 가두는 역할을 사울이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들이 주의 사자들을 죽일 것이라는 예언과 더불어 살인 행위에 대하여 그들에게 임할 심판의 예언을 선포하셨습니다.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던 특권을 이 사람들은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회개하라외치셨던 천국 복음을 수용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그의 의를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이들은 과거 조상들처럼 거부하였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자기들의 음성을 들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의로운 음성을 덮어버렸습니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언제나 문제는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모든 음성을 억눌러 없애려고 하기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그들은 다른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27: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7: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빌라도의 음성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소리에 집중했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을 외치면서 저들은 외쳤습니다. 27:25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것에 하나님은 분명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엄중하게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23: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이들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해 손들고 나온 무리들입니다. 거기에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위로 향하지 못하고, 자기 내면으로 향하지 않으면서 이들의 열정과 길은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듣지 않고 보지 않아서입니다. 자기들 주장만 있었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고자 했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자기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면 우리도 똑같은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들에게서 보고 느껴 그 길이 아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서 있어야 함을 말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무거운 우리 짐과 죄에 얽매이지 않도록 만드는 힘입니다. 그러기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인간이 할 일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몸짓으로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피의 은혜로 거룩함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 외에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처럼 모든 것이 위선이요 거짓일 뿐입니다. 거짓과 위선의 자리에는 그 어떤 진정성도 자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보여주고자 하는 쇼맨십 신앙이 아닌 정직함에 기초한 참 신앙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 될 수 있고, 그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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