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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살아 있는 교회: 행 2장 42-47절]

by 최수근 2018. 10. 29.

2018년 10월 28일 주일설교동영상

[살아 있는 교회: 행 2장 42-4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교회를 왜 세우셨을까요? 그리고 왜 교회여야 합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나중에 생각해 내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역사의 우연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로 세워졌습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 분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즉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한 백성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은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 주님이 세우신 교회에 헌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헌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제도권 교회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환멸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일 뿐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도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없는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는 교회 없는 그리스도인을 기괴한 변종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워져 가고 유지되고 주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헌신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계속해서 개혁되고 갱신되는 것을 보게 되기를 갈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결국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원천은 바로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생명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건강하고 살아있는 교회라고 믿습니까? 살아있는 교회의 두드러진 표지들은 무엇입니까?

오순절에 처음으로 성령에 충만했던 예루살렘 교회를 새로운 눈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에 의해 급진적으로 동요하며 태동한 교회입니다.

그 점에서 초대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으로 네 가지 살아있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의 첫 번째 모습은 배우는 교회입니다.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그날 예루살렘에 큼직한 학교 하나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임명하시고 지난 3년간 훈련시킨 사도들이 교사였고, 학생들이 무려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새로운 회심자들이 신비한 경험이나 즐기면서 자신의 지성을 무시하거나 신학을 경시하거나 사고하기를 멈춰버린 것이 아니라는 데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이 무시될 때 그래서 자신의 신비하고 영적인 경험에만 의존하다보면 우리의 신앙은 왜곡되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회심한 자들과 기존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만이 유일한 교사이며, 인간 교사들 없이도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도들을 교회의 교사로 부르셨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발 앞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배우는 데 힘썼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는 교회 즉 사도들의 가르치는 권위에 복종하는 교회로 서야 합니다. 물론 사도들이 교회 안에 있지 않지만 교회는 사도적 계승을 이어받아 말씀의 계시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교회는 목사들이 강단에서 성경 말씀을 전하고, 살아 있는 교회의 부모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가르치고, 살아 있는 교회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서 성장하기 위해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성하는 것은 참되면서도 살아 있는 교회의 첫 번째 표지입니다.

살아있는 교회의 첫 번째 표지가 배움이라면, 두 번째 표지는 교제입니다. “그들이 교제하기를 힘쓰니라교제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 인데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적인 삶으로서 우리가 신자로서 공유하는 것입니다.

좀 더 이 단어를 심화해서 말하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과 함께 나누는 것 둘 다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후자인 함께 나누는 것에 더욱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44-4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교회라면 모두 수도원 공동체가 될 것이고, 성령 충만한 신자들이라면 모두 초대 교회의 신자들의 예를 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분명히 예수님은 제자들 중 일부를 전적이고 자발적인 가난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유 재산을 금하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조차 팔고 바치는 것은 자발적이었습니다. 2:46절에는 그들이 집에서 떡을 떼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분명히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들이 만나는 장소인 집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전적인 가난으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 구절이 주는 도전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 그들은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보살폈고, 자신의 재산을 그들과 공유했습니다. 이러한 자발적인 기독교적 나눔의 원리는 분명히 영속적인 것입니다.

성령은 자기 백성에게 인정어린 사회적 양심을 주십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사랑하고 돌보는 교회입니다. 관대함은 항상 하나님 백성의 특성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너그러우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의 교회 역시 너그러워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의 세 번째 특성은 예배입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념했는데 이 기도는 개인 기도가 아니라 기도회와 기도 예배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이런 요약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이들의 예배가 두 가지 점에서 균형 잡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그들의 예배는 공식적이면서 비공식적이었습니다. 46절에 의하면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즉각적으로 제도적인 교회를 폐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에 따라 제도적인 교회를 개혁하려고 갈망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성전의 희생 제사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속에서 성취되었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통적인 성전 기도 예배에 지속적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의 예배를 집에서 모이는 더 비공식적인 모임으로 보충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누구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모임을 선호할 수 있지만 누구는 더 공식적이고 위엄 있는 예배를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헌데 초대교회는 둘 다 있었고, 우리에게도 둘 다 필요합니다. 어떤 규모건 모든 교회는 작은 교제 모임들로 쪼개져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의 예배는 기쁨이 넘치면서도 경건했습니다. 아갈리아시스는 넘치는 기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고, 이제는 그들의 마음 속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쁨이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장례식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기쁨에 넘친 종교입니다. 모든 예배는 축제여야 합니다. 성찬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의 예배는 불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경박하지 않았습니다. 경건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셨고 그들은 놀라움과 겸비함 가운데 그 분 앞에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배움과 코이노니아, 예배는 교회의 내적 생활의 측면입니다. 42절은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발아래서 공부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을 돌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한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물론 47절에 이르러서야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부 생활에만 사로잡힌 채 게토에서 살면서, 밖에 있는 잃어버린 사람들과 외로운 사람들이 처한 재난은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깥 세상과 관계 맺고 있었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선교에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도록 세상 속에서 부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증거하고 섬기도록 세상 속으로 다시 보내집니다.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선교를 모델로 삼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예수님은 안전하게 면역된 자신의 천국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섬기기 위해 자신에게서 영광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분은 실제로 우리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고, 우리의 삶을 사셨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 자신이 우리 세계로 들어오셨던 것처럼 우리를 불러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성령님은 오순절에 오신 이래로 지금까지 결코 교회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이 행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낮추고 성령의 충만과 지시와 권능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 사랑의 교제, 기쁨에 넘친 예배, 그리고 외부를 향한 지속적인 전도라는 살아있는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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