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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장 44-49절

by 최수근 2021. 4. 18.

2021년 4월 18일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장 44-4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를 지나 교부시대에 이르기까지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오늘처럼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박해가 심할 때는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고통받으며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믿다 죽을 수도 있는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의 두려움도 넘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을까요? 그것도 자기만 몰래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지금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님 믿다가 죽자고 전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예수 믿고 복 받자고 하면 혹시 올까 몰라도 죽자고 하면 누가 오겠어요. 그래도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또 많은 사람이 믿었어요.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이들이 미혹된 걸까요? 믿으면 죽는데 말입니다. 아니면 쉽게 신앙을 버리기도 하고 조금만 힘들은 상황이 와도 이런 상황을 힘들어 하고 두려워하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걸까요? 그때와 지금이 이렇게 다른 것은 서로가 바라보고 지향하는 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려준 것은 이 땅의 나라에서의 번성이 결코 아닙니다. 영원토록 가치 있는 유산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번영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였습니다. 물론 이 가치를 처음 놓칠뻔 했던 사건도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도 있었고, 헬라파과부들과 히브리파과부들의 구제에서 비롯된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위기를 잘 넘어서서 세상과는 결이 다른 가치관과 믿음 위에 세워져 갈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유무상통할 수 있었던 것도 세상의 것이 주가 되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못한 일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출발점에서 시작된 교회는 자기를 위한 담을 쌓거나 뭔가 축적하고자 하는 일을 시도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흩어지는 교회, 즉 선교적 교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본질이 흐려졌을 때 이 땅에서 교회는 교회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부터 시작된 영적 바람은 온 세상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소식이 전하여지는 에너지이었고, 그로 인해 성도들은 복음을 부여잡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고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제자들이 이와 같은 결단과 실행이 바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사복음서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 이후 바닥으로 떨어질 데로 떨어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금 추스르시고 세워가시는 과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시기 위해 이렇게 빌드업 해가시는 과정이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회의적이 상황이 닥쳐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에 대한 회의 말입니다. 그렇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뭔가 신앙 생활한다고 하다가는 어느 순간 힘에 부쳐 그만둘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우리를 세워가시는 이 과정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영적 빌드업을 통해 우리는 회의를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서서히 제자들이 이 상황을 인지하고 확신해가도록 주님은 세밀하게 이런 플랜을 가동하셨습니다. 처음 부활의 과정에서 제자들은 확신과 확신에 기대어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증언을 허탄한 소리로 들었고, 의심했습니다.

2436-43절의 상황을 보면 그런 그들을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귀신으로 생각할까 봐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만졌을까요? 의심하는 도마를 그린 화가는 도마가 그 상처에 손가락을 넣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구운 생선 한 토막까지 드셨습니다. 그냥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영으로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육체가 부활하였음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작은 행동을 통해 보여주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안식일 후 첫날부터 되어진 일들을 이렇게 목격하였습니다. 증인은 사건을 본 사람입니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을 예수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증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편적인 이야기의 증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어가고자 하시는지를 말입니다. 구원의 큰 그림을 갖고 있을 때 사람들은 이 땅에서 누리는 작은 행복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부활한 자신의 모습과 식사하시는 것을 통해 영이 아닌 육체의 부활임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이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오랫 동안 하나님의 구원계획 아래에서 이것이 진행되어왔고 예수님에게서 마침내 성취되었음을 성경을 통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444절부터 4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를 위한 증인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도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40일을 통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요.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신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를 들어 소상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서 말씀했던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언의 성취라고 하여도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성취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자기 기대대로만 해석했습니다.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던 거죠.

부활의 사건에 직면하여 이것을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상태를 보면 처음에는 놀라워하고 의심스러워하고 그러다 예수님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 실제로 부활의 증인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주셨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됩니다.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을 하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4:11에서 보면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했을 때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우리도 똑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하면 하나님이 성취하신 것들을 볼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우리 지적 수준에서 보려고 하면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의 닫혀있던 영적 지각 능력을 완전히 열어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억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출애굽의 기억이 유대인들을 끌어왔듯이 부활의 기억이 그리스도인들을 강력하게 끌고 가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단 구원파 경우도 구원을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깨달음이 언제 몇 시에 왔냐를 알아야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죠.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알고 이해함으로써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아닙니다. 다분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영적 진리를 깨닫는 것은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는 성경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성경을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마음의 밭이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마음을 열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아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해서 번져갈 회개의 역사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른 컨테츠를 갖고 나가느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복음의 컨텐츠가 우리 안에 축적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나갈 때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이 지금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사에 끊임없이 나왔던 이단들의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는데, 교주가 또 다른 보혜사라고 거짓 증거를 한다는데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일의 증인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교회가 선교적 교회, 증인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되고 잘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지요. 교회는 교회로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특정한 목적을 부여받은 거룩한 증인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증인의 삶은 우리만의 능력으로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누누이 약속하셨습니다.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까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0일간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주심을 기대하며 기도하였고, 마침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것이 증인의 완성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인위적 종교가 아님이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박해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 하나만의 이유는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들이 구원을 받았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어주셨기에 그들 또한 그 부활에 동참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죽음의 권세 앞에 무릎 꿇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이 감정적으로 이입된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지식이었고, 영적 지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들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붙잡고 있던 신앙을 버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음이 지속될 수 있습니까?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다고 여겨지는 다른 가치들이 마음을 사로잡으면 복음이고, 예수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가는 거죠. 우리는 약한 이들의 배교하는 모습을 보기보다는 끝까지 그런 위협과 유혹들을 이겨낸 믿음의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나열하고 있는 믿음의 증인들 말입니다.

우리 앞에는 그런 강렬했던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환호하고 있습니다. 이 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달려가도록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길에 서 있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천년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이 삶이 우리에게 얼마나 축복인지를 깨달읍시다. 역사적인 과업임을 자각합시다. 과업완수를 위해 우리의 시선을 다른 것에게 빼앗기지 맙시다. 오늘도 예수님으로 충만하여 예수님이 샘솟게 하시는 기쁨과 능력으로 삽시다.

구원의 말씀은 교회와 성도의 삶에 응집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도록 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 앞에 펼쳐질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목적을 깨닫고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일매일 느껴지고 실제화될 때 우리는 믿음의 삶에서 하늘의 능력을 누릴 수 있고, 누구도 줄 수 없는 행복함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함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가서 이 일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복 된 인생입니다. 요일 1: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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