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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당신의 말에 진정성이 있습니까? 엡 4장 25-29절

by 최수근 2021. 5. 2.

2021년 5월 2일 주일예배

[당신의 말에 진정성이 있습니까? 엡 4장 25-2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요즘 진정성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벨기에 대사 부인이 한 의류업체 여직원의 뺨을 때려 사람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부인의 직접적인 사과 없이 벨기에 대사관이 늦게나마 SNS계정을 통해 사과를 했어요. 그런데 해당 글에 한국인을 조롱하는 비난 댓글이 올라오자 그 댓글에 벨기에 대사관이 웃겨요를 달았습니다. 이런 행동은 벨기에 대사관의 사과에 진정성이 전혀 없음을 자인하는 겁니다.

지구온난화 문제로 탄소중립위원회를 설치하며 탈 화석연료에 대한 정부의 선언이 이어지고 있는데, 환경단체들은 정부의 이런 행동들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동해 쪽에 엄청난 화력발전소가 지어지고 있거든요. 탄소중립목표도 유럽과 다른 나라들은 목표치를 분명하게 내놓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목표치조차 산정하지 못하고 있어요. 정책에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는 거죠.

세월호 진상조사에서도 지난 수년간 실체를 밝혀내고자 했지만, 그간의 노력에 진정성이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시간은 덧없이 지나가고 참으로 아픈 기억을 품고 사람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져 가는데, 매번 새롭게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지만 정치권은 이것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이용만 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행동을 신뢰 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진정성이 느껴질 때입니다. 결국은 진정성이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이루어집니다. 하는 척하는 시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넘쳐나는 말의 향연 속에서는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성 있는 모습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 신앙이 거짓 없음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딤후 1: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이와 같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바울이 디모데를 인정하고 있듯이 다른 이들이 여러분의 신앙을 이처럼 보고 있습니까?

참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입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진정 거듭나셨습니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셨습니까? 4:24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25절에서 그런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하고 새 사람을 입었으면 그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 진정성은 다각적인 삶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야만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거듭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거죠. “변화하려고 노력중이야라는 말처럼 진정성 없는 말은 없습니다. 수려한 말의 향연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합니까?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에베소서 425절에서는 언어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이후에 행하고 있는 언어의 변화에서 우리의 진정성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언어의 변화입니까?

회사의 회식자리라든가 동창모임, 친구와의 만남, 친목회 등에서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실은 의미 있는 말들이 그렇게 오가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적인 분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굳이 나누지 않아도 될 잘잘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대화가 겉돕니다. 나중에 또 만나도 그 패턴이 반복되죠. 마음의 울림이 아닌 세치 혀의 단순한 울림일 뿐입니다. 속으로는 뻥치고 있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들어줍니다.

우리가 새 사람을 입었으면 이런 패턴을 끊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표현을 성경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거짓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거짓에 해당하는 프슈도스는 기만, 허위 등 진실 되지 못한 행위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단어입니다. 거짓을 버리라는 말씀이 쉬운 일 같지만 실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위선과 기만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현대인들은 스마트폰 덕분에 가장 아름답게 보정된 모습과 말로 자신을 도배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SNS를 통해 포장된 그럴싸한 자신들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SNS 만을 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잘 경배하고 아름다운 제자의 삶을 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민낯을 보게 되면 치장된 그들의 모습은 거기에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이렇게 내용은 그렇지 않은데 과대 포장된 것은 거짓입니다.

저는 SNS 공간을 통해 수많은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기고만장했던 베드로처럼 자기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 이들이 없는 것처럼 소리 높이고 있지만, 그것에 과연 진정성이 있을까요? 위기의 순간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번에 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은 정인이 양모도 SNS에서는 자상한 엄마이고 훌륭한 크리스천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드러냈어요. 그러나 실제론 입에 담기에도 힘든 끔찍한 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고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 가린다고 해서 가리어 질 수 없는데 여전히 거짓의 틀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건 하나님도 속이고 타인도 속이고 나아가 자신을 속이는 삶입니다. 이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거짓을 버리기 위해선 내 모습 그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겸손해질 때만이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을 버렸을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는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된 것입니까? 우리에게 참인 것은 오직 한분 예수님뿐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거짓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가 아무리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여도 그 참된 것이 전하여 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즉각적으로 상대방은 반응할 겁니다. 속으로 너나 잘하세요.” “너나 잘 믿으세요.”

우리가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하는 데에 오늘 말씀은 매우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웃을 넘어서 신앙의 교제권 안에 있는 상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각 지체는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거짓이 지속되고 있다면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성도의 교제는 신뢰 위에 세워지는 것인데, 바로 그 신뢰는 진리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거짓됨은 교제를 침해하고 몸을 무너뜨립니다. 급소를 찌르는 행위인 것입니다. 반면에 진리는 그것을 강화시켜줍니다.

이렇게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씀하라고 한 이후에 29절에서 또 다른 언어의 변화에 대해 말씀을 합니다.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말은 무엇입니까? 사프로스는 썩은” “부패해서 쓸데없는이란 말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말들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상하게 만들 수 있는 말들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쓰레기 같은 말, 사람들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세상은 살리는 말보다는 죽이는 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똑같이 말하고 있다면 거기에 어떻게 은혜가 흘러갈 수 있겠습니까? 은혜의 진정성은 나를 통해 그 은혜가 실제적으로 흘러갈 수 있을 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라면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해 선한 말을 하라 하였습니다. 공허한 세상을 향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갈 수 있도록 살리는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정녕 필요한 말이어야 하는 거죠.

예수님은 말의 중요함을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말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그러기에 우리가 내 뱉은 모든 부주의한 말에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우리는 분명 새로운 대화의 기준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 같이 자신의 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대신 그들을 돕고, 격려하고, 성원하고, 위로하고, 북돋우고, 그렇게 말의 진정성을 통해 생명이신 예수님이 나를 통해 흘러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안에 있음을 사람들은 신뢰할 것입니다. 나의 신앙에 진정성이 금이 가지 않도록 여러분의 입술이 변화되고 삶이 성결하게 되어 말과 삶이 하나가 되기를, 그래서 여러분을 통해 생명이신 주님이 풍성하게 흘러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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