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1일 주일설교동영상
[부활하신 주님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요 21장 15-1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지난 부활주일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는 처음에 제자들의 상황은 기쁘고 즐거운 잔치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의 여러 행동과도 연결이 됩니다. 제자들은 몇 가지 참담한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서로 높아지고자 자리를 갖고 다투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히는 순간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고 의심했습니다. 결국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라는 책망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디프레스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숨어버리는 경향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가룟 유다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저녁 식탁의 자리에서 만났음에도, 제자들의 행동을 보면 의외의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갈릴리로 돌아온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 둘은 실패로 점철되었던 자신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로 찾아오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자기는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우울한 기분으로 배에 올랐으니 고기가 잡히겠습니까? 밤새 고생만 합니다. 뭔가 엑티브한 일을 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배에 오른 건데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어떤 일에 집중하거나 몰두한다고 해서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이런 실수를 범하면서 더 큰 중압감에 짓눌리어 힘들어합니다.
밤새 뭔가를 떨궈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런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 없이 갈릴리 호수로 나가 밤새 허탕만 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말씀하셨고, 그로 인해 밤새 텅텅 비어있었던 빈 배가 물고기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허무함이 충만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처음 베드로를 만났던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신적 두려움으로 예수님의 주되심 앞에 무릎을 꿇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손수 준비하신 아침밥으로 밤새 허기진 제자들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말이 필요 없는 힐링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숨 가쁘게 돌아가던 시간이 멈춰 서고 그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시고, 정녕 부활하신 주님 안에 거할 때만이 그들의 채워짐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 거죠.
이렇게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에게 적극적으로 반응한 이가 베드로입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예수님이심을 인지하자마자 온몸으로 반응하며 바다에 뛰어들어 예수님에게로 헤엄쳐 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고 다시금 그들의 삶을 채워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제자들은 회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피곤한 삶의 자리 가운데, 우리의 실패했던 초라한 인생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만으로 우리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모한 자신감의 사람, 베드로였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제자들이 멋진 고기잡이에 대해 생각하며 해변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의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요 21:15을 보십시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마 16장에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는데 여기에서는 다시 시몬이라고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 사람들”이라는 단어에서 사람과 사물에 다 사용될 수 있는 대명사가 사용됩니다. 그렇게 보면 두 가지 의미의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는 함께 일하는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과 “네가 이 배들과 고기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질문으로 볼 수 있는 거죠.
의미가 어떤 것이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무모한 자신감의 발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의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고백 되는 답을 확인하고자 하신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는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맥없이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종종 그런 실패 앞에 서게 됩니다. 단언했는데, 결코 그럴 리 없다고 했는데, 그런 말들이 공허하게 흩날리는 경우들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도 요 13:37에서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큰소리쳤지만, 이 맹세를 한 후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한 일은 사복음서 모두가 기록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참담하고도 창피한 기억입니다.
그런 그였기에 예수님이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 앞에 베드로는 머리를 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창피를 무릅쓰고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자신의 진정성을 주님이 알고 계심을 피력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굳건하게 대답하였음에도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묻습니다.
요 21: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베드로는 또다시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집요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째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요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연거푸 세 번 받고 나니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하시니 근심할 수밖에요. 순간 그는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그 상황에 직면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근심하게 되었던 거죠.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그 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베드로와의 대화는 예수님의 치료 이야기입니다. 허세로 가득 찬 충성의 약속에 이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세 번 확인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베드로 자신의 무모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실패의 기억을 치료하고자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걱정, 염려를 치료해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제자들을 옭아매고 있는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새로운 길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의 상처 속에 숨어들어 왜곡된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치료해주셨습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세 번의 초대는 베드로를 괴롭히던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함의 기억으로부터 그를 구해내고자 하신 예수님의 의도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용서 앞에 설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용서 앞에 우리의 파괴적인 기억의 짐들이 내려진 후에야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 함을 얻었을 때 앞으로 전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은 후에야 우리가 능력을 받고, 변화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증거 할 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가룟 유다가 만날 수 있었다면 그도 치유되지 않았을까요? 그는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기 전에 파괴적인 기억의 짐 앞에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였기에 그런 용서와 치유의 시간을 맞이할 수 없었던 거죠.
자기비판, 의기소침, 영적 비관주의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걸림돌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에너지를 끊임없이 방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고갈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무모한 자신감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처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칠 수 있습니다. 이성과 지성의 그릇된 선택을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반복이 되다 보면 의기소침해질 수 있고 영적으로 비관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 문을 닫고 숨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 앞에 다시 서야만 합니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주님 없이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다시 품어주시고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파괴적인 기억의 짐들을 내려놓게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회복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 치유되고, 회복됨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대한 그의 봉사를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양 떼를 먹이고 돌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베드로의 평생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순교하기까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고 있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베드로처럼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돌보고 보호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신앙은 결코 혼자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잖습니까?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새 계명의 실천은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진정 만남으로써 치유 되어진 이들만이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상처로 가득한 기억의 짐을 여전히 짊어지고서는 자기 상처에 집중하고 얽매여 자기만을 바라보기에 다른 지체들을 돌아볼 수 없어서입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몸을 자해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다른 가치들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의기소침하거나 영적침체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빈배에서 만선으로 바꾸어 주시며, 베드로에게 “이것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우리도 진정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내가 이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분을 사랑함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되겠지요?
오늘 이렇게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와 여러분 안에 힘든 기억, 아픈 상처들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여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살아가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영적 에너지가 채워져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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