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3일 주일예배
[성도로서 마땅하지 않습니다: 엡 5장 3-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행복추구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 하나입니다.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고통이 없는 상태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권리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론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매우 힘들어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행복 추구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도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보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성도로 부르심은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진노의 자녀에서 사랑받는 자녀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이 특별한 은혜를 알고 믿기 시작할 때 우리는 기독교의 핵심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거룩으로의 초대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인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구원이 아닙니다. 세상에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들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선함을 눌러버리는 악 또한 흘러넘쳐 도덕적인 것과 선함이 묻혀 버리는 것이 문제이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도덕적인 삶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더 잘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한 의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은 되어야 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도덕적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명예나 영예, 인류의 선을 위하여 착하게 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삶에 경고합니다.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성경은 새롭게 주어진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우리의 삶에 대해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거듭난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준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성인군자가 우리 삶의 기준이 아닙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울은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됨됨이 때문에 죄악이 우리와 공존할 수 없다는 일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영역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절에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의 온전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 사랑 안에 있기에 자녀는 아버지를 좋아하고 그런 아버지를 닮아가려고 합니다. 그냥 무작정 하나님을 닮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면 그 확신 가운데 서 있다면 당연히 아버지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함으로써 온전하다면 우리의 삶에서 문제 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성경은 온전한 관계 안에 서있도록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사랑 가운데, 거룩함 가운데 그리고 정결함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로마서 7장을 보면 우리 안에 선과 악이 병존하여 갈등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자유하게 하시고, 보증하시고, 이끌어가십니다. 이런 성령님의 견인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우리 안에서 반복되는 내적갈등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마음으로 생각한 일들이 행동을 통하여 실제로 드러난 것만큼 악하지 않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가장 좋아할 일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시작이어서입니다. 특히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행동이 아닌 마음과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 그래서 타자가 알 수 없는 일들까지도 정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몰라도 그 내면을 하나님은 훤히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로서 우리는 죄 된 것을 드러나게 하는 모든 형태와 그것들을 암시하는 모든 것을 금해야만 합니다. 죄의 영역에 대해 단호해야 해요. 처음부터 분명하게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에게 삶의 영역을 허용하지 않는 적극적인 모습을 오늘 말씀은 요청하고 있어요. 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언급조차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언뜻 암시하지도 말고,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아예 얼씬거리지도 말라는 겁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것은 성도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옛사람의 삶에 속한 거예요. 순결하고 거룩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분의 거룩함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룩하지 않은 그 어떤 것을 언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 말과 상태가 언급된다는 것 자체가 마음 한 켠에 그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어느 순간 이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겁니다. 마귀는 그 순간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위험성과 함께 말의 실수로 넘어지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내적 변화와 함께 언어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세워갈 수 있습니다. 변화 받은 자임에도 여전히 과거 언어의 틀을 버리지 못한다면 변화가 진정 이루어진 걸까요? 그러기에 오늘 4절 말씀에선 성도로서 마땅치 아니한 말을 그치라고 합니다. 4절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은 성도에게 마땅치 아니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대화에 보면 모양 빠지는 말들이 많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아무 의미 없는 빈말이나 생각 없이 던지는 쓸모없는 말들, 다른 이들을 가십거리 삼아 떠들어대는 말들인 경우입니다. 이것은 어리석고 부끄러운 대화입니다. 이런 자리는 성도로서 마땅치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금하고 있는 것들은 그 당시 세속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입니다. 천박하고 추잡하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그런 유의 삶에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속 도시에서 놀던 가락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것을 즐기고 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전혀 다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에베소의 상황보다 더욱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보다 더 다양한 소통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더욱 다변화되어,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들로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런 다양한 매체들을 통하여 쉽게 말하고, 보고, 듣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은밀하게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줄 모르고 점점 깊어가는 겁니다. 바로 그런 접촉점들을 처음부터 잘라내라는 것입니다. 살전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사도는 음행이나 더러운 것이나, 그러한 모든 것 중 어느 것이라도 우리를 시험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들은 그 모양이나 가능성의 최소한이라도 피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허용하면 여러분은 얼마 가지 않아 정복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로 살아가기를 결단한다면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성도에게 마땅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신앙고백과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유심히 봅니다. 세상 사람처럼 말하는 것들을 조용히 귀 담아 듣습니다. 그렇게 마음 속에 묻어 놨다고 결정타를 날려요. 성도로서 무시 당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답게 살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살지 말라고 합니다. 다르게 말하라고 권면하고 있어요. 매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것에 감사하면 잘못될 일이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입술에는 감사의 찬양이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감사가 넘치는 삶과 거기에서 비롯된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빛나게 하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말을 통하여, 모든 행동을 통하여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것을 끊어내지 못하고 성과 속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들을 향해 말씀은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이 말씀은 우리가 얻은 구원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신데 그렇게까지? 난 그런 것까지는 몰랐어”라고 빨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매사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열거하고 있는 죄악을 습관적으로 지속하고 있다면 그와 같은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을 기업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런 죄악 중에 어떠한 한 가지 죄에 실족하여 넘어진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축출될 거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그 사람의 특징일 때, 바로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라면, 그것이 그의 인격의 실상이요 분위기라면, 그가 죄의 영역에서 행복을 느끼고 바로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무런 기업을 받지 못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떠나지 아니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어떻게, 무엇을 힘입어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전 품행과 삶이 하나님의 율법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무관하며 그들은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갖지 못한 자입니다.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그 과정이 시작된 자입니다. 그는 씻김을 받았습니다.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산 자, 새로운 관계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자신의 죄악을 가리려는 임시방편 가림막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 있다는 증거와 그 구원의 서정에서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음을 보여주지 아니하는 한 우리는 전혀 그 나라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이 나라와 저 나라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들이 있어요.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지금 이곳에 서 있을 뿐입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님의 대속의 피를 힘입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즉시 말입니다. 언제가 돌아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 자들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그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엡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래서 우리에게 오늘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속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7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그들과 함께 영원한 유기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님의 말씀에,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문을 쉽게 죄에게 열어주지 마십시오. 단초를 제공하지 마세요. 세상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 성령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 시간이 당장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인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은 그 뒤에 찾아오는 선물입니다. 그와 같은 진리를 안 시인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시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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