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7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세월을 아끼는 지혜: 에베소서 5장 15-17절]
인류는 오랫동안 지혜를 추구해왔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도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특히 그리스의 많은 철학자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들은 지혜를 발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철학은 그 어원이 헬라어인 필로소피아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랫동안 이렇게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들은 지혜를 찾아왔던 거죠. 궁극적인 지식과 이해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던 겁니다. 한번쯤은 이런 이들의 책을 읽으며 지혜를 갈망했던 경험을 갖고 계시지요?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온 지혜와 기독교의 지혜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지혜는 완전한 인간, 신적인 인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안으로부터의 열망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지혜는 그것을 포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어서 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볼 때 기독교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와는 전혀 다른 가치와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깊은 차이를 우리가 인식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한 바른 응답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에베소서 1-5장의 많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행하라고 하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통해 영광받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빛의 자녀로서 우리의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미칠 거룩한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를 위해 우리는 분명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일을 행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행함에 앞서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살피는 과정이 요구됩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접근해야 합니다.
엡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5절 첫머리에 “그런즉”이라고 하였습니다. 앞에 14절을 받아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추어주셨기에 우리는 더는 어둠에 거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 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정녕 그렇다면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자기에게 중요하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참으로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일, 사업, 재산증식, 자녀 교육, 가족, 취미, 관계 등에는 많은 시간, 많은 재정을 써가면서 수고합니다. 그런데 무작정 그런 일들에 골몰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참으로 무엇이 유익한지 자세히 살펴보게 되죠.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느낌, 감정, 지식, 의지, 욕망 등이 앞서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것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황,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비추어서 우리는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결정과 행동,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은 바로 이러한 것에 의해서 확정되고 실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이렇게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 일을 지속적으로 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쉼없이 계속하여 관심을 가지고 면밀하게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긴장입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벧전 5장 8절에서 이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요청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다고 보시면 되요. 아무 생각없이 가다가는 그 선을 건드려서 폭파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크게 상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매순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길이 확실하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 혹은 마귀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가기 위해 위장해 놓은 길인지 말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지금 당장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두 길을 분별해낼 수 있는 지혜입니다. 영적분별력이지요!
이 필요에 의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지혜 없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이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이 추구하고 있는 지혜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지혜를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성경 곳곳에서 지혜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기독교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졌던 이 지혜가 발현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렇게 볼 때 어리석은 자는 자명해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지혜로운 자로서 우리를 부르심은 행동보다도 시간과 관련되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단지 시간을 절약하여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라는 의미일까요? 24시간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무정하게 흘러갑니다. 물리적인 시간이라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원문을 살펴보면 세월이라는 단어가 특별합니다. 카이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의미로서 사용할 때는 크로노스라는 말을 씁니다. 이건 연대기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크로노스 안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삶은 단지 흘러가고 마는 것, 그래서 값어치 없는 것,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연유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시간은 모든 것을 가져 간다. 심지어 마음까지도”라고 한탄을 했습니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심리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작정되어 주어진 특정한 시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단순한 물리적 시간의 아낌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권면인 것입니다. 은혜의 시간이 그냥 흘러가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분별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때가 악하니라” 말씀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의도는 우리의 시대가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대비하기 위해선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이 시대를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이것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신 지혜와 지식의 보화로 채워질 때만이 그것을 분별해 낼 수 있고 그 시간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이고, 종말론적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 있는 자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지혜는 이것을 볼 수 없습니다. 헛똑똑이인 것입니다. 창세기 6장 노아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그마치 120년이라는 시간을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가 쏟아질 때까지도 그들은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120년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하면 우리가 노아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어주시고 빛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한 똑 같은 결과입니다. 카이로스의 세월을 아낄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진정 서 있는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러므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말씀을 받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제 카이로스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우리는 더는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어디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입니다. 어둠이 아닌 지혜로운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뜻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자입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세월을 아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헛된 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말미암아 새사람된 빛의 자녀로서 이 악한 세대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그 뜻 안에서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안에 서 있을 때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신 아버지의 목적으로 세워갈 수 있어서입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못함으로서 우리는 너무도 잘못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황당한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기대했는데 그 모든 것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예수님은 예견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나의 의욕과 목적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침내 그 나라에서 안주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만 합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우릴 향하신 하나님의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악하고 악합니다. 이 시대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서 이 땅의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살아가는 빛의 자녀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동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이 새로워지는 관계의 원리(1): 엡 5장 21-33절 (0) | 2021.07.13 |
---|---|
술취함과 성령충만: 엡 5장 18-21절 (0) | 2021.07.05 |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장 8-14절 (0) | 2021.06.20 |
성도로서 마땅하지 않습니다: 엡 5장 3-7절 (0) | 2021.06.14 |
우리는 무엇에 취해 살고 있는가? 행 2장 4-13절 (0) | 2021.05.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