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7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습 2장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기독교는 단순히 내세 지향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천국이 전부가 아닌 겁니다. 그렇다고 오늘 우리 삶의 형통함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목적이 불분명하면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선택과 부르심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 걸까요?
소위 기독교 신앙을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릅니다. 끝을 향해 가고 있지만, 종말은 오늘과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 순간, 그 끝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했었다가 아니라 수없는 오늘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단면이 아닌 전체의 우리를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한없이 주어질까요? 성경은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 바로 심판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스바냐 선지자가 선포하고 있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특정한 시대를 향한 말씀이 아닌, 오고 오는 모든 시대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경고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이것은 궁극적인 종말의 날로써 모든 시대에 선포되는 심판의 경고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심판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곤 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도 일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경고의 시한이 닥쳐와도 변화된 행동을 취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곤 했던 겁니다.
인간의 좋지 않은 특징 가운데 하나가 다 끝났는데도 끝까지 버텨 보려는 행동입니다. 어리석게도 “설마 이것이 끝이겠어? 그래도 조금의 시간은 있지 않을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시고 명확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습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미 하나님은 계획하셨고 계획하신 대로 심판을 실행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는 다른 변명과 핑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습니까? 긴박한 시간에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멈추시지 않겠어요.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분명히 크게 잘못하였음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뻔뻔하고 안하무인 격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끄러운지 모르고 더 큰소리칩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죄는 사람을 뻔뻔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니크샤프”는 부끄러워 하다는 뜻도 있지만 “사모하다, 갈망하다, 바라다”는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도 갈망하지도 사모하지도 않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대신에 사람의 구원을 의지하곤 하였던 거죠. 따라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은 스바냐 1장 6절에서 언급한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1:6)을 다시금 지적한 것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스바냐는 하나님을 찾도록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백성을 향해 당신을 사모하고 찾으며 또한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셨음에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습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하나님은 저들을 멸절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고자 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동사의 반복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모이는 길이 살길이라는 거예요. 그냥 저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예배로의 부르심입니다. 즉 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 범죄 한 모든 백성이 다 같이 하나님 앞으로 모여 나아와 한 가지로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매우 중요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 가운데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급합니다. 언제 우리 주님 다시 오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속히 임하리라는 그래서 언제라도 맞이할 준비 된 종말론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2절에서 임박한 심판 앞에서 우리가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습 1: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항상 준비된 자만이 주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긴박함을 잃어버리고 느슨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놓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비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서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느순하게 있다가 문제가 닥친 다음에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날을 대비하는 것은 수치를 모르는 이들이나 구원받은 자들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어요.
습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그냥 겸손한 이들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도 세상적인 겸손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낮아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낮아짐이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겸손일 때만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뜻의 우선되고 세상의 것들이 우선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겸손한 자라면 여호와를 사모하고 그분 앞에 거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수치를 모르는 자들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음에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삶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십니다. 그것은 그 삶에 대한 갈망과 연속성이 우리에게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이젠 죽으면 천당 가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을 내려놓고 매순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날을 알지 못합니다.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에게는 영적 긴장 필요합니다.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종하며 사는 이들은 여호와의 공의 가운데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겸손한 자들임에도 다시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중함을 암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견지하며 계속해야 할 합당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 신앙적 덕목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은 어느 순간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순간까지 끊임없이 견지하고 실천해야 할 성도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 그것도 후회함 없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부끄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항상 이사야의 심정인 거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한다면 물론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겠지요.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그의 구원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스바냐는 회개를 촉구하고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3b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거저 주는 구원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전제된 것입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아무리 우리 행위가 완벽해도 말입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러기에 우리는 수치를 모르는 자여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한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인지하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벧후 2: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혹시 구원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더욱 깨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서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수치를 모르는 강퍅한 백성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신 우리 자신의 존재를 지켜냅시다. 이를 위해 우리의 회복을 이루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날마다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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