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4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기독교 신앙의 건강함은 은혜와 율법의 올바른 균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둘은 나누어서 생각할 영역이 아닙니다. 둘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와 함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율법을 따라 삶으로서 거룩한 백성다움을 갖추게 됩니다. 여기에서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럼 폐기되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기준을 새롭게 세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에 걸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단락이 시작되는 5장 1절을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보좌에 왕같이 앉으시고, 그의 제자들은 왕 앞에 나오는 신하들처럼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 그리고 그 나라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상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산상수훈이라고 말합니다. 산상수훈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 새롭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품어야 할 삶의 기준이자 원리입니다. “이렇게 살아라.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니까 이젠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삶은 어떤 수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보통은 너무 부담되지 않을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사탄도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파악하고 있기에 “적당히 하라고,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속삭여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전과는 분명 다른 삶의 가치와 방식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이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6장 8절에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산상수훈 전체의 어조를 명료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이 땅의 삶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를 살려면 세상을 보고 세상의 가치를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상수훈을 접한 사람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와 갈망을 가진, 분명히 세상과는 구별되는 것들을 만나면서 과연 저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수준입니다. 이 일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도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됨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요 1장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후사입니다. 이런 신분의 변화는 그에 걸맞은 삶이 요청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그 동기와 행위와 일과 언어와 사상과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을 맨 앞에 모시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세상에서 살던 자기 위주의 방식으로선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과 생활의 변화가 분명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 스스로 고립되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거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곳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 그 질서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와 같은 선택의 길에 서서 세상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면서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의 선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를 끄는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복 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복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마카리오스’라는 단어입니다. 최고의 행복, 최상의 복으로서 현재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심리적인 복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복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아쉐르’와는 개념적으로 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아쉐르의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아쉐르’는 오늘날 우리의 개념 속에 있는 물질적인 복이나 일반적인 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삶에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아쉐르’라는 말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닌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뭔가를 받아서 그것을 누릴 수 있어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 실현되는 것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느끼는 심오한 기쁨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복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복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시 144편 15절에서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말씀하였고, 시 33편 12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것으로 채워져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행복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여덟 가지의 복은 이것을 얻기 위해 너희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잘하고 있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복이라고,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복을 선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시각으로 볼 때 세상은 그 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슬퍼하는 자는 종종 위로받지 못하고,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지도 못하고, 정의를 갈망하는 자는 종종 무덤에 묻힐 때까지도 그 정의를 보지 못합니다. 세상은 오히려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지상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다.”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같은 세상에서 지금 역설적인 일들이 실현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보면 절대 복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하늘의 가치로 보면 절대 복입니다. 그 점에서 이 말씀은 바로 복음의 선언입니다. 이 땅에서 정말 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하늘의 언어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도대체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무슨 뜻에서 말씀하신 걸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무슨 이유로 복이 있다는 걸까요? 왜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일까요?
3절에서 가난한 자를 뜻하는 헬라어 '프토코이'는 단순하게 일용할 양식이 없는 물질적 빈곤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더 넓은 의미로 외적인 위로뿐만 아니라 내적인 위로가 결핍되어있는 상태의 사람을 말합니다. 특히 구약에서 가난한 자, “아나임”이라는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과 배려를 갖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난과 경건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삶에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데 힘을 썼고, 또 그와 같은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부요한 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눅 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물론 이 말씀이 부 자체를 화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부가 가져오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부로 인한 자기 신뢰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구약의 배경을 가진 “가난한 자”라는 말에 “심령”이란 말을 첨가하시면서 구약의 가난한 자에 대한 의미를 강화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에 우리가 이를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역사하셔야만 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공허함을 깨달은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영적인 겸손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을 때,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을 의뢰함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교만한 자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서기를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뱅은 말하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 자신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 성소로 달려가는 사람을 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도덕성이나 선한 행실을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은 자기 부인이요 자기부정입니다. 그 점에서 심령의 가난은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기본적인 품성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겸손하게 간청함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관찰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고백함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늘 주님을 사모하고 그 은혜에 목말라 있습니까?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 마음이 가난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를 예수님은 “복 있는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입니다.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통해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들에게선 상상할 수 없었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그 기쁨이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더군다나 값없이 주시기에 기쁨이 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기쁨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은혜로부터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복 있다고 예수님은 선포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 곧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인간적으로 노력하는 자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장차 주어지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주어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장차 참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복을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증받았고, 여기서 누리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그들과 함께하시므로 현실적인 역경에도 불구하고 천국은 이미 그들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삶이 어찌 되겠습니까? 전폭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언어가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굳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제일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일이 그 뒤에 따르는 모든 다른 은혜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고서는 애통해할 수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될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가난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만이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위하여 사용할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오직 모든 것을 누리는 자만이 그 어떤 것도 아낌없이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깝거든요.
예수님은 이와 같은 심령의 가난함을 완벽하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으로 오신 예수님,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품어야 할 가난한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필수 조건은 우리의 영적인 가난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이들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강한 자들이 아니라 약한 자들에게, 자신의 용맹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자만하는 이들이 아니라 작은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살고, 그곳에서 높아지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는 영적 가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보잘것없는 인생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이 삶을 가장 복된 삶, 천국을 소유한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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