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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십자가의 길, 영광의 길: 마 17장 1-9절

by 최수근 2022. 2. 28.

2022년 2월 27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십자가의 길, 영광의 길: 마 17장 1-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마태복음 16장을 변곡점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때까지 예수님은 권능으로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일반 대중은 주님의 능력에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백성들이 기대하던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을 선택하시고 그 길을 가고자 할 때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 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제자의 길에 대한 선택을 요청하셨습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의 길이 어떠한 길인지 그 본질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잘못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점에서 이겨내셨던 사탄의 유혹 앞에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서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 신앙은 늘 긴장 관계로 이어져 가게 됩니다.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여기에서 예수님의 기대는 의미가 없죠. 오직 자기 기대일 뿐입니다. 그래서 미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달려왔어도 가차 없이 그 길에서 돌아서 버립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신앙고백과 고난의 길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이 일이 있은 지 6일 이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의 제자만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가셨습니다.

산에 다 올라가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그들 앞에서 이전의 예수님은 간데없고,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예수님이 변형되셨습니다. 성경은 그 상황을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참모습, 본래 하나님과 본체이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본 것입니다. 게다가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두 인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이것은 저들에게 가슴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의 내용은 마태복음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또 다른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931절에 의하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루어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영광의 모습이었지만, 영광스럽게 변화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고난받고 돌아가셔야 했던 겁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급작스럽게 예수님이 거룩하신 모습으로 변모하시고,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선지자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베드로는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17:4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두려움 가운데서도 베드로는 산 아래서 예수님이 고난받는 자리가 아닌,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그 자리가 좋았다고 생각하였던 거죠. 그러기에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영광의 자리에 영원히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 할 인자의 길이 아직도 남아 있음에도 베드로는 성급하게 현재에 주저앉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즐기자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고난과 죽음의 길을 자연스럽게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에 대해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의 권세를 누리는 것은 고난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이를 무시하고 왕 노릇부터 먼저 하려고 하였던 겁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나머지 제자들도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길은 주저하였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지금 무엇인가를 갖기를 원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큰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보상을 받아 그의 영광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과 공유해야 할 고난의 길은 회피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많은 이들은 이렇게 현재의 과제를 망각한 채 미래의 상급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사탄이 우리에게 던지는 유혹의 미끼입니다. 이것을 덥석 물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길은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죠.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할 때 급작스럽게 구름이 와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제자들에게 확증해주셨습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께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해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더는 고수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임당한 뒤,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나가고 있으므로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해 주신 것입니다.

제자로서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우리 자신의 과제인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아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변화산에 초막 셋을 짓고자 하는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는 고난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영광의 자리만을 선호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옛 사고의 틀을 깨고 새로운 복음,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으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셨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예수님의 가시는 길목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뒤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어둠의 권세 아래 있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한다면,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우리도 주님 곁에서 매번 겉도는 제자들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영적인 소통이 단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복음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강력하게 요청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는 하늘의 소리에 놀라 엎드려 있던 제자들이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하시며 손을 대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빛나는 예수님도, 모세와 엘리야도, 뒤덮였던 구름도 다 없어지고, 그곳에는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잠시 허락되었던 하나님 나라 영광의 자리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을 목격한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산을 내려오실 때,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예수님은 의도를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변형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일은 세 명의 제자를 위한 자리였습니다. 지금은 형편없어 보이는 제자들이지만 결국 변화산에서의 경험이 제자들에겐 훗날 그들의 사역에서 매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경험들을 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당장은 깨닫지 못해도 어느 순간에 그 영적 경험들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신 것은, 부질없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그들의 입을 막지 않으셨다면 그것을 보여주신 의도와 상관없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하셨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을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받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일은 관심 밖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차단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잠깐이나마 경험하도록 한 목적은 분명해집니다.

첫 번째 목적은 고난의 길이 패배가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영광의 길임을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죽음에 관하여 얘기하면 패배, 또는 사명의 실패를 떠올립니다. 그러니 제자들 반대하는 겁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을 겪고, 죽임당하실 예수님께서 여전히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대리자임을 설득력 있고, 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고난은 꼭 넘어야 할 과정임을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이 끝이 아님을 강하게 시각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잃었기 때문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과 목적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세 후에나 수난 예고 후에나 하나님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예수님이 그의 유일한 아들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의 세례 때 들려온 하늘의 소리는 예수님만이 혼자 들은 반면에 변화산 사건 때의 하늘의 소리는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저희 말을 들으라!”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만이 이 땅에서 성부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목적은 변화산 사건이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공생애와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고난을 이어 주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한 후에 독자들은 빠르게 전개되는 일련의 이야기들 속에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과 더러운 귀신들이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면서 모든 대적들, 마귀 세력, 질병, 비판자들, 자연 등에 대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이야기에서 전환점, 아니 실제로 위기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예고하실 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야 할 길과 뒤를 따르는 무리들의 길에 차이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승리와 영광에 취해 있다가 막상 고난의 자리로 들어서려는 것은 받아들이기에 곤란했던 겁니다. 사람들은 그러면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오늘 변화산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 십자가로 끝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하고, 제자로서 예수님의 뒤를 쫓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이 제자들에게 혼란스러움을 안겨줄 시점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으로 변형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칭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푯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는 그 길은 마냥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담대하고, 기뻐하며, 도전에 기꺼이 대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연기된 만족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축복, , 행복, 영광을 약속하고 있는 성경의 부분들만 주목하고 자기희생, 고난, 자신의 십자가 지라고 요구하는 말씀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난은 건너뛰고, 영광의 앞선 자리로 나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면 영광의 자리가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그 고난의 자리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7절에서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또한 상속자로서 고난 뒤에 주어질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또한 조급함이 아닌 참고 기다릴 수 있게 하는 믿음의 인내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때입니다. 무엇보다도 영광만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은 버려야만 합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은 주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지 않는 한, 그리고 십자가에서 나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예수님과 함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 주님과 동행하며, 묵묵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자기 부인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갈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싶어 하는 이 땅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오늘 산상변모주일 이후 32일 재의 수요일입니다. 이날부터 사순절 절기가 시작됩니다. 주님이 선포하심으로 묵묵히 가신 고난의 길을 묵상하며 이 길에 주님과 함께 서 있는지 우리들의 모습을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온전한 제자로서 주님의 기대에 참여하여 예수님과 매일같이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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