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6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장 5-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더 배트맨’에 보면 ‘리들러’라는 빌런이 사람들을 해치면서 암호문을 남겨놓습니다. 그 암호문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이 뜻한 것이 나오도록 장치를 해놓은 것이죠. 암호를 해독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간발의 차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습니다. 암호는 상대방을 교란하거나 계획을 숨기기 위해 특히 전쟁 중에 많이 사용합니다. 암호를 잘 해독하면 좋은데, 엉터리로 해독하면 그것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이렇게 암호해독 하듯이 어렵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로에 갇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밝히 계시하셨습니다.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모든 계획까지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디에 그렇게 하셨나요? 바로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암호해독 하듯이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길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벧후 3:16에서 그런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일이 예배의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와 속건제, 속죄제에 대해서 소상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합니까? 우리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방법대로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해 자기 생각과 선호하는 방법대로 예배하며 신앙 생활하려고 합니다. 내가 선호하는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그 답을 성경을 통해 하나둘 찾아가야 합니다. 그중에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중요한 기도임에도 많은 사람이 어려워하는 것, 그것이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영적 생활의 동력이 됩니다. 하늘의 축복과 능력을 가져다주는 중대한 통로여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기도를 어느 특별한 이의 전유물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활짝 열려 있는 문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나이 든 사람까지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십니다. 주님이 이걸 약속하셨습니다.
요 15:16b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렇게 누구에게나 기도의 문을 열어놓으셨는데도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기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심으로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막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 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눅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이건 늘 기도하러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본을 제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중요하게 말씀한 것 가운데 하나가 기도의 동기입니다. 여러분은 왜 기도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기도하십니까? 단지 일상에서 자신의 부족한 것을 구하고자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내면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하나님이 나의 속사정을 낱낱이 아시도록 알려드려야 하는 것이 혹시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마태복음 6장 8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시편 139편에서 시인이 고백하기를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여실히 드러난다고 했듯이 오늘 우리의 삶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처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든 것을 인지하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아버지라면, 만일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아신다면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걸까요? 그냥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먹이시고, 입히시고, 재우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실은 초기에는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함을 알려드리고자 기도하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을 설득하고자 기도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미성숙한 믿음의 단계에서 많은 사람이 겪는 기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톰 라이트도 그의 책 ‘이것이 복음이다’ 마지막 장에서 주기도문을 이야기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의 사이에 신뢰가 깊어지지 않았을 때, 믿음이 깊어지지 않아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할 때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기 시작하면 기도는 달라집니다. 자신에게 이기적으로 집중하던 기도가 비로소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요청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는 기도, 그렇게 우리 기도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기도하였음에도 여전히 기도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교제의 자리, 친밀한 교통의 자리가 아니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기도가 단지 사람들에게 경건함을 보여주는 방편으로 전락하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기도에 관한 잘못된 접근방법을 예수님은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범하고 있었던 잘못된 기도를 따라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기도의 은혜를 입으려면 거짓된 방법이 아닌 올바른 방법을 찾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기도가 상달되고, 그렇게 살아있는 기도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외식하는 자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데 열심이었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군중의 존경을 열망하였습니다. 이렇게 외식하는 이들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둡니다. 이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해선 우리의 기도에 관한 생각과 기도 생활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향한 기도 자리로 회복될 때 우리 안에 놀라운 은총의 사건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여주지 말고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6장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기대하며 기도한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겠어요. 기도의 토씨 하나까지 신경을 쓴다면 어떻게 진솔하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수사학적 기도일뿐입니다. 시적이고 어떻게든 기도를 아름답게 하려고 하는 거죠. 반대로 기도하라고 할 때 사양하고 뒤로 빼는 것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것도 외식입니다. 자신의 기도언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염려하여 사양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고 싶은 이생의 자랑은 오늘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넘어뜨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허망한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의 잘못된 방향을 벗어나서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온전한 기도의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해 서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야 기도가 더 깊어지고 우리 마음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식하기에 실은 기도가 어려운 겁니다. 사람들의 판단이 두려운 것이죠. “오래 신앙 생활했는데 저렇게 기도를 버벅거리네”라는 소리를 듣기 싫은 거죠. 누가 누가 잘하나 기도의 경연이 되어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걸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로 서 있습니다. 우리가 유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의 짧은 말 한마디에도 기뻐하는 아버지 앞에 말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지켜보시고,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친밀함의 교제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실함입니다. 예수님은 7절 말씀을 통해 기도에 진실함의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한다는 말은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열망이 없이, 단순히 반복하는 형식적 기도를 금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의미 없는 형식적 기도를 반복하는 이유는 기도에 관한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기도를 오래 해야만 신이 응답할 거로 생각하고 있어서죠. “말을 많이 한다는 것”과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이 같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때에 따라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에 몰입하곤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금하신 건 단지 주절거리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기도를 시간으로 채우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툰 말 한마디라도 진실함이 담겨 있고,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할 때 우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함이 풍성해지지 않겠습니까? 요 4:24에서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기도형식이나 기도에 소비하는 기도의 분량, 시간의 길이에 주의를 집중할 때 우리의 기도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지 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잘못된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8절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같이 우리가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할 걸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지를 명확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는데 다 알아서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원하세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직접적 접촉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녀가 계속 와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앞에 와서 말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으려는 것 훨씬 이상으로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많은 말은 할 것이 아니나 많은 기도를 해야 한다. 유창한 말이 아니라 계속적인 경건한 마음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길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와 무게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깊이와 무게를 더 하시기 위해 9절a에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기도의 표준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 기도의 첫머리에서 우리 기도의 소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향해야 함을 선포합니다. 9절b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진수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에게 우리 마음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는 허공을 향해 냅다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열망을 시인은 노래하였습니다. 시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채워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믿고, 굳건한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묶어주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힘을 공급해서 하나님만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 감사를 받으시고 그곳에서 축복된 삶을 누리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신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건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하신다니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하시는 축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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