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6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마 5장 38-4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지난주 한 TV 프로그램에서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LA 흑인폭동을 다루었습니다. 그 당시 한인사회가 엄청난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이 놀라웠습니다. 가해자인 흑인들을 향해 분노하기보다는 평화적으로 진행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날의 사건을 부를 때도 LA 폭동이라고 하지 않고, 한인들은 그냥 “사이구”라고 불렀습니다. 폭동이라고 하면 폭력을 행한 가해자 흑인, 그리고 피해자인 한인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흑인들을 적으로 삼지 않겠다는 마음인 겁니다.
그러나 이건 특별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폭발 직전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라들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쾅, 저기서 쾅, 긴장이 흐릅니다. 주변에 나라들과 사람들을 적처럼 대하고 삽니다. 그 삶이 어떻겠습니까?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책 “적을 만들다”에서 “우리는 타인을 적으로 만들고, 그 위에 산 자들의 지옥을 건설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타인을 적으로 만들다 보면 내 속엔 지옥이 싹튼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가 바깥에 있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걸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서 예외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웃 사랑의 실천을 과연 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지옥을 사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은 이런 피폐한 삶이 아닌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지옥을 살아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과연 하나님 나라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회를 바라보시며 이 문제를 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의도하셨던 사람들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목적하는 바를 왜곡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살다 보면 다툴 수도 있고,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반대로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 어떤 기준도 없다 보면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에 하나님은 율법을 제정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1:22a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23~25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법의 목적은 법정에서 가해자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을 구체적으로 언급해 정의를 세우고, 또한 희생자에게 정확히 똑같은 만큼만 배상하고 그 이상은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데 있었습니다. 법을 통해 가해자건 피해자건 과도한 보복으로 인한 또 다른 피해가 없도록 한 배려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정당한 징벌 원리를 법정으로부터 대인관계 영역으로 무한 확장 시켜버렸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법을 오용했던 겁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보복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원수 갚는 일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과거 율법을 통해서 주신 보복법이 개인적인 관계에서 적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절a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사람들 속엔 자신이 해를 입은 만큼 되갚아 주고 싶고, 손해 본 만큼이 아닌 그 이상을 보상받고 싶어 합니다. 복수해야만 통쾌한 겁니다. 피해를 보고서는 그냥 억울해서 살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걸 뒤엎어버리셨습니다. 보복이 아니라 상대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이 불의한 자들의 횡포 앞에서 그냥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악한 행동을 너그럽게 보아주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악한 자의 번영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허용하시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되갚아주고자 하는 속된 마음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먼저 나가고, 입에서 거친 말들이 나가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행한 대로 되갚아주거나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겠다는 것이 세상 정의의 논리이다보니 끝이 날 수 없습니다.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세상의 논리를 거부하고 끊어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부인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어요.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각자 자기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나의 주장이 죽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살려 하니까 문제가 꼬여 버리는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4개의 짧은 예를 통해서 이 땅에 수많은 불의하고 무례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어떻게 적용하며, 어느 선까지 사람들을 품고 가야 할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급진적인 요구입니다.
첫 번째 예는 모욕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지금 뺨을 맞는 장면은 손등으로 오른쪽 뺨을 강하게 때리는 모욕적인 장면입니다. 뺨을 맞는 건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뺨을 맞는 순간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되받아 쳐주거나 상대의 멱살을 잡고 싸우게 되는 거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 순간 씩씩거리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열 받아 있는 상대방에게 왼쪽 뺨을 가만히 들이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건 오히려 상대방의 화를 폭발시켜 한 대 맞고 끝날 일을 여러 대 더 맞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 걸까요? 우리의 감정, 우리의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불의하고도 무례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받은 만큼 되돌려 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되갚지 못하면 억울해서 죽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지 말고, 분노를 절제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살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나를 해코지 하는 자들을 아예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불의함에 검사가 되지 말고, 그들의 어리석음에 반응하지 말고 긍휼의 마음으로 받아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체포되어 끌려가셨을 때,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손으로 때렸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질했습니다. 가시관을 씌우고 조롱하였습니다. 이들의 폭력과 모욕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은 갖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잔인한 조롱과 모욕에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이것을 보여주신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무조건 당해라. 함부로 대적하지 마라. 그런 걸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단지 되받아치고, 복수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만족하기를 거부하라는 거죠. 우리는 세상의 길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번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반응을 결정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가치관, 행동과 같거나 비슷하지 말라는 거죠. 저들은 자신들의 의를 위해 정죄하기 바빴던 자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팔복에서 말씀하신 긍휼의 삶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단지 악한 자들에게 되갚아 주는 짜릿함과 통쾌함이 아닌 하늘의 상을 바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는 부당하게 우리의 소유를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40절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는 아무도 개인의 겉옷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겉옷은 개인에게 소중한 소유물입니다. 출 22:26-27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이것은 다시 돌려받을 수 있는 겉옷이 아닌 돌려받지 못할 속옷을 빼앗길 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것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거기에 목숨을 걸곤 합니다. 절대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속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 속옷뿐만 아니라 겉옷까지도 벗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은 해가 진 이후에 덮고 잘 수 있는 이불의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건강과 생명과도 직결되는 것조차도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먼저 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제자들로서 자기 소유, 자기 권리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예는 그 당시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상황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평민들을 징발하여 노역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단 오리, 약 천 걸음 정도만큼만 허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가실 때 로마 군병이 구레네 사람 시므온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 경우도 이런 경우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강제 노역으로 오리를 가야 하는 경우 기꺼이 십 리까지라도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처음에 군인들이 강요할 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무조건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다음은 나의 선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그 일에 대해 억울해하지 말고 기꺼이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강제 노역 같은 일은 없습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바쁜데, 귀찮게 어떤 일을 도와달라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고 실은 고민이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고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라 하셨습니다. 그들의 주문보다도 더 열심히 도와주라는 겁니다.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것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산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들이 하는 수준으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이신 예수님을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에게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상의 헌신적인 섬김과 자기 내어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삶이 될 때 그 속에서 감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네 번째 상황은 아주 민감한 상황입니다. 돈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돈 문제는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간에도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돈 얘기를 해오면 슬쩍 뒤로 물러섭니다.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곤 하죠. 예수님이 매우 어려운 일을 말씀하시는 것은 돈의 문제는 늘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추구하던 부자 청년도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말에 낙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개인의 권리와 소유에 집착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데 큰 걸림돌입니다. 이 걸림돌을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우리 자신의 권리보다는 다른 이의 권리를 앞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 겁니다. 팔복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불의하거나 무례한 취급을 받을 때, 단순히 법적인 보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은혜의 실제를 통해 저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생각, 마음, 행동이 세상과 다를 때 처음에는 무시당할 수도 있고, 오히려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몸소 실천하셨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와 같은 삶을 행할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저들 속에 보여질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자연인을 통제하는 무서운 자아의 가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살고 싶은 자연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는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작은 욕심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참 제자가 되어 주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권리와 자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참 제자도입니다. 이것은 큰 도전입니다. 그러나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마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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