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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황폐하고 무너뜨려지리라: 마 23장 37절-24장 2절

by 최수근 2024. 1. 21.

2023년 12월 3일 주일예배

[황폐하고 무너뜨려지리라: 마 23장 37절-24장 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땅을 개간하여 기름지게 만드는 일은 많은 시간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땅이 황폐해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급속하게 망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땅뿐이겠습니까? 한 사람의 삶도 같습니다. 그 삶을 세워가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그와 같은 말로를 상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제까지나 잘되기를 기대하려고만 합니다. 실은 그 끝을 생각한다면, 개인적인 종말이든 역사적인 종말이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숙연해지고 매 순간이 진중해지지 않을까요? 그러기에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을 예비할 줄 아는 신앙적인 삶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로운 분이시며, 또한 참으로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옵니다. 반면에 심판은 공의로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상반된 것의 균형을 하나님께서 잡아주실 때 우리는 그런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할지, 우리의 신앙적 밸런스를 유지해 갈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한쪽으로 치우칠 때 언제나 문제가 발생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 균형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설 수 없었습니다. 견고한 것처럼 보였던 믿음이 순식간에 황폐해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어그러진 신앙의 모습 속에서 이 균형을 잃어버린 이들의 비극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상황과는 달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신들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맹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에 끝까지 자신들을 돌보아주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읽어낸 거죠.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애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직전까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는 특수한 집단을 향했던 예수님의 애도는 예루살렘을 향해, 더 정확히 말하면 전체 이스라엘을 향해 확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했던 반면에 하나님은 그들을 모으고 보호하시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람들,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쳤을까요?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님도 그와 같이 행하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날개 아래에 모은다는 이미지는 그들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갈릴리와 이방지역, 예루살렘 등을 오가며 그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행동은 그 당시의 제한된 영역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 주님은 바로 이곳에서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십니다. 그들을 지키시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원한 약속이십니다.

28:20b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이스라엘은 끝내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복음의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정녕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 원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다른 기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 앞에는 선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으고자 하시는 그 써클 안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느냐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손길을 거절한다면 그 결과는 오롯이 선택한 자의 몫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람들이 좋은 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그런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거절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이들을 여전히 볼 수 있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입니다.

복음 앞에 선 많은 사람의 상반된 선택, 그건 자기 자신을 향하신 주님의 그 찐사랑을 믿지 못하여서입니다.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복음이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어떻게 올인할 수 있겠어요.

이스라엘의 거절로 인해 예수님은 그들에게 두 가지의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는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수없이 그들의 집은 황폐해졌습니다. 버려진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불의함에 머물러 있을 때 그들의 삶의 터전이 황폐하게 될 것을 예전부터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왕상 9:8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왕상 9:9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경고대로 그들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막대기 앞에 엎어지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학습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을 시작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 일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다른 외부 환경이 그런 결과로 몰아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들이 원하지 않아서였습니다. 원하지 않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모으시려고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 분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삶은 강건하게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버리면 황폐해지고 버려질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일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언제까지 볼 수 없다고 하셨느냐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다시 오실 때까지를 말합니다. 왜 이런 시간을 주셨을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이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긴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애써 외면한다면 우리는 결국 심판대 앞에서 그분을 심판주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이르기 전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시편 118:26을 인용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이 구절은 먼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에 마 21:9에서 인용되었는데 그때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소리높여 외치는 무리들은 다윗의 메시아적 아들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며 이 구절의 말씀으로 외쳤습니다.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무리들의 외침을 받아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메시아, 이스라엘의 구원자, 커다란 심판의 시간 뒤에 자기 백성들에게로 다시 오시는 오실 자로 확인해주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앞으로 종말의 때에 다시 오실 자이십니다. 그렇게 파루시아, 종말의 때에 예수님이 오실 그때에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서 믿고 고백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큰 슬픔이요 고통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어떻게 예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대림절 첫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임하실 그리스도를 기리며 희망의 촛불을 켰습니다. 이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던 예수님은 다시금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뵙고 그분을 통해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황폐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 결과를 예수님은 성전의 무너짐을 예언하심으로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23장까지 종교 지도자들과 신학적인 논쟁이 있고 난 뒤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전과 도성을 떠나서 밤에 머물려는 베다니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길은 감람산을 경유하는데, 그들의 뒤쪽 아래는 성전의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루살렘 도성을 돌아보며 예수님에게 성전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가리킵니다.

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가복음 131절에 따르면 그들은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라고 외칩니다. 성전의 아름다움과 장엄함 앞에서 이들이 탄복할 때 예수님은 저것들이 결코 아무것도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24: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말씀하시면서 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하셨습니다. 그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건물이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성전이 그냥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는 성전이었습니다. 유대인들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겼던 성전은 A.D.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의 통곡의 벽 정도의 잔재만 남아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을 그 이전까지 믿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 곳인데 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신념에 절대 반하는 말을 예수님이 선포하셨기에 이 말이 빌미가 되어 예수님은 법정에 서게 되고,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전을 포기하신 걸까요? 하나님은 에스겔서에서도 그들의 신념을 깨뜨리는 환상을 에스겔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에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헛되고 허망한 것들에 의해 조정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많은 이들은 성전의 화려함만을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견고해 보이고 화려해 보여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속 빈 강정 같은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에 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흩으시면 존재할 것은 이 땅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땅의 요동치는 것들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도록 차단하십시오. 우리가 소유해야 할 나라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여야 합니다.

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그와 함께 우리의 시선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실제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만이 우리의 삶이 황폐해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를 지켜주시는 주님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영원한 나라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은혜로운 대림절 절기를 보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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