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4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장 6절]
행복 추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의 삶에 최대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라마다 헌법을 보아도 국민의 행복 추구권리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행복 추구를 물질적 잣대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영끌”이라는 단어가 이것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다른 가치를 사람들은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가시적인 행복 추구에 몰두해 있던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아테네 시민이여, 오로지 돈을 벌고 명성과 위신을 높이는 일에 매달리면서 진리와 지혜와 영혼의 향상에는 생각이나 주의를 조금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종교에 입문하는 이들도 진리와 지혜와 영혼의 향상보다는 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목적도 비슷합니다. 이 땅의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복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행복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자신의 갈망을 채우고자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죠.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목적이 잘못된 데에서 시작됩니다. 이들의 갈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 추구에 있습니다. 그렇게 축복과 행복을 찾다 보니 정작 하나님 나라, 하나님 영광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목적에서 벗어난 신앙은 결국 파국으로 끝납니다. 사람들을 더욱 주리게 하고 목마르게 하여 그런 자신을 채워 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쫓아다니다가 인생이 피폐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말년에 아픈 몸으로 캠퍼스를 찾아가 젊은이들에게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2천 년 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때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갈급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갈망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의 단순한 기대를 이루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런 군중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이 진정 갈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절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지금 예수님 앞에 나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들은 모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예수님 앞에 배부른 자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리고 목마름이 있기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떤 목마름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우리 환경에서 먹을 것이 풍성하지만, 예수님 당시는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배불리 먹고,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간절함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나 사회 기득권층이 굶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메시아가 오셔야만 그들의 삶을 회복해주실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강력한 권능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기대하면서 예수님 앞으로 몰려왔던 겁니다.
그렇게 주리고 목마른 백성들을 향해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선포했으니 순간 사람들은 솔깃했을 겁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의”라는 말보다는 배부를 수 있다는 말에 관심을 가졌을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육체적인 그들의 관심을 넘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의도를 바로 알기 위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의를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개인의 의로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입니다. 구원받은 후에 죄로부터 벗어 난 삶을 소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풀어가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고, 자신의 의를 절대시하다 보면, 거룩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율법화 되면서 위선적인 의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게 자기의 의라는 수렁에 빠지면, 수많은 규정에 얽매인 삶이 되어 오히려 채워지는 삶이 아니라 피곤한 인생이 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연약한 지체를 향한 정죄로 인해 타인까지도 힘들게 만들 겁니다.
둘째, 학대받거나 부당함을 경험했던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인 정의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말씀의 의도를 이와 같은 사회적인 정의에서 찾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독재자를 향해 항거하기도 하고, 세상의 불평등함과 불공평한 분배의 개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투사가 된 거죠. 그렇게 정의 실현을 위해 애쓰던 이들을 통해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삶의 문제들이 개선되고, 이 땅의 정의가 실현되기도 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최종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의 의로서 우리의 의지와 행위에 지배되지 않는 하나님 구원의 의, 바로 복음의 의를 말합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 구원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여겨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말씀하셨을 때 바로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덧입혀지기를 바래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의 의가 이 땅과 자신의 삶 가운데에 임하기를 매일매일 갈망해야 합니다.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6절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가 실현되는 것을 사모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모함의 강도는 어떤 수준이어야 할까요? “주리고 목마른” 자의 상황은 매우 궁핍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당장 채움을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아주 잔인한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한 어린아이가 굶주린 채 힘없이 앉아 있는 저편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독수리를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굶주려 지쳐 있는 아이의 갈망은 딴 데 있지 않습니다. 주림과 목마름이 채워져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급함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여러분의 갈급함이 독수리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아이의 갈급함 그 이상입니까? 자신의 죄인 됨을 애통해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삶에서 거룩함의 열매로 나타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매일 매일 갈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욕망이 채워짐을 바라는 수준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국교회 안에 종교적인 경험에 갈급한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늘 새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딘 가에 새로운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로 몰려갑니다. 한참 거기에서 시끌벅적하다가 또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곤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막연한 종교적인 감정과 영적인 굶주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어나게 하는 영적인 굶주림은 나의 전 존재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갈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갈망은 우리 힘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리고 목마름을 온전하게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시 42:1에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으로 우리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를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채워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하여주시기에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종교적인 엑스터시도, 자기만족도 아닌 하나님 의 의에 대한 영적인 갈망을 갖고 주께 나올 때 그와 같은 갈망이 결국은 채워질 것이기에 우리는 복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갈증을 채워주는 많은 것이 세상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채우고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다시금 주리고 목이 마르고, 그래서 더 색다르고 자극적인 샘물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니 오히려 더 피곤하고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으로의 초대에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채움을 갈망하는 이들은, 하늘의 신령한 은혜들로 채워지고, 나아가 개인적인 주림과 목마름 또한 채워주실 것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채움의 완성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말론적인 기대와 소망이 있음으로,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삶을 지치지 않도록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단지 말로써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걸까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삶에서 거룩한 변화가 경험될 때 실제가 됩니다. 의에 대한 열정적인 추구는 변화된 마음에서 나오는데, 이 변화된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은혜를 갈망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보좌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선언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지속되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배부르면 끝입니다.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난 이 정도면 만족해’라고 선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채워주실 은혜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기를 날마다 갈망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매우 귀한 선물을 준비해주십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리고 목마른 성도들을 위해 준비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수이십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신이 길 잃어 방황하는 자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죽도록 사모하는 자들은 비록 이 땅의 행복의 조건들로 그 삶이 메워지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만족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소유, 권력, 쾌락과 같은 것들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에 속고 말 것입니다. 그것들은 갈증을 경감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더욱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하나님 나라와 통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갈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야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매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날마다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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