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8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8절]
교회에서 사람을 세울 때, 주로 객관적으로 관찰해볼 수 있는 지표들을 살펴보곤 합니다. “교회에 출석한 지 몇 년 되었는가? 주일성수를 잘하는가?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는가? 교회의 어떤 부서에서 섬기고 있는가? 십일조 생활은 하는가? 교회 양육과정을 이수했는가? 몇 사람을 전도했는가? ” 그래서 점수를 합산해서 그 사람이 자격이 되는지 먼저 검증합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 기준으로 인해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에서 목회자와 교인들의 눈에 띄기 위해선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신앙 스펙을 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도 이런 점검 사항들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꽤 신앙적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 그것을 인정받고자 하고, 다른 이들도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만으로 경건함을 추구하다 보면 매우 실제적인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형식주의의 위험입니다.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지면 마음의 상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분노와 냉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들을 얄팍한 종교 행위로 살짝 덮어 놓은 꼴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마음의 문제는 언제고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말 겁니다.
오늘 우리 삶과 신앙의 문제는 거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 15: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헬라어로 마음은 ‘카르디아’, 히브리어로는 ‘레브’라는 말을 씁니다. 마음은 사람의 존재와 인격의 중심으로서 지성과 의지와 감정의 근본 원천입니다. 사람의 전인적인 사고와 행동을 주관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 마음은 항상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은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지켜 가느냐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기에 잠언 4장 23절에서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새롭게 하고, 청결함을 이루어가는 일은 우리를 복의 자리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복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라는 말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걸까요? 그건 위선이 없는, 아무것도 숨겨진 것 없이 진실하고 신실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그의 진실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투명합니다. 기만하거나 속내를 숨긴다거나 비열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나누어진 마음입니다. 마음 한편에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자 하나, 또 다른 편에서는 세상에 여전히 마음이 가 있습니다. 이것을 감추기 위해 위선을 떨고, 그럴싸하게 속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정화된’, ‘흠이 없는’이란 뜻으로 “깨끗함”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내적인 순결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청결하다고 해서 그 안에 죄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하기를 그가 선을 행하기를 원할 때 악이 그와 함께하였고(21절), 그의 지체 속에서 한 법이 그의 마음의 법과 싸워 그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가려 한다고 했습니다(23절).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겼습니다(25절). 그러나 이와 같은 약함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마음의 청결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요청하셨을까요? 내적인 청결을 강조하신 까닭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의 진실함을 원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외적인 거룩함에 만족하여 종교의 외형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들은 너무나 쉽게 내적인 순결함을 무시하고 대신에 외적인 행위들과 과정들을 중심으로 믿음을 만들어가고자 했습니다. 물론 겉을 보면 그들은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고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외적인 청결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가슴 한쪽에 답답함이 남아 있어 세례 요한에게도 와보고, 예수님에게도 기웃거려보는 겁니다. 그런 저들을 예수님은 통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난 위선의 진수입니다. 그들 속에 진정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들이 인간의 내면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타락과 죄의 결과로 악하고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17장 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문젯거리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이 궁극적으로 교리의 이해와 지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교리와 지적 이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적인 동의에서만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마음에 새기라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행위와 외적 품행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겉으로 화려하게 보여도 부정하고 더러운 죄로 물든 마음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24:3-5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준을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 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우리가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여도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죄로 물들어 청결하지 못하다면 그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마음은 본래 전적으로 만물보다 부패하고 타락하고 거짓되어 심히 사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 5절에서 시인도 고백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청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15장 9절에서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깨끗하게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누구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마음을 흠 없고 순결하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길 원한다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사를 나를 위한 것으로 여기고, 주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옛사람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청결함을 이루어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악 된 마음 때문에 언제나 애통하며,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교육을 통해 선한 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요? 사람은 최고의 교육을 받고서도 극악한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지적 훈련만으로는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또 환경을 개선하려는 여러 수고만으로도 개선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큰 비극입니다. 지금 세상에 수많은 이들의 문제도 이와 같은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에 있고, 마음은 절망할 정도로 악하고 부패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해야 할 영적 의무입니다. 이를 위해 가난한 심령으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며 애통해하고, 의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내적 청결을 위한 일상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반복적인 청소를 하듯 마음의 청결을 위해서도 반복적으로 영적인 청소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강퍅해진 마음은 우리를 가로막아 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죄로 가리어진 상태에선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악 된 인간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장애물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보다’라는 말은 총체적인 경험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 하나님과 아는 사이가 되는 것,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점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은 볼 수 없습니다.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우리의 전인격이 다시금 회복됨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하게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친히 내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 있음을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로 인해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만물을 지혜로 다스리시고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그와 같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신앙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결코 두렵거나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하게 느껴지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런 믿음으로 인해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이 항상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들 위에 드리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말씀을 통해서 언약의 하나님을 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와 함께 하나님을 누리는 통로의 완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회복되고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활짝 열려 있지만, 어느 순간 죄가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친교가 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요”(시 16:8)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내적으로 정결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불완전해도 지금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고,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오늘도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영적인 훈련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이런 우리를 불편하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반응에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리가 나누어진 마음이 아닌 온전하고도 성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 가운데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지고의 비전을 깨닫고 우리의 걸어가야 할 길을 더욱 확신하며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욱더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광휘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한 가지 확신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며 이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이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심으로써 만나주시고,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음에도, 인생의 문제들과 잡다한 일들에 매어 달려 바둥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과 경이로움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청결이라는 목표를 우리 존재 중심에 두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깨끗하게 하심과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청결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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