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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5절

by 최수근 2021. 11. 7.

2021년 11월 7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5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은 어떤 성품의 소유자를 좋아할까요? 요즘 각 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을 보면 사람들이 대가 좀 센 사람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온유해 보이는 이들은 전혀 부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늘 양보하고 자기 것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리더십의 부재로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력함, 추진력, 결단력 등이 최고의 덕목으로 꼽히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광풍이 부는 세상에서 과연 온유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생각의 반대편에 서서 진정한 승리가 누구에게 있는지 확인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옛사람의 틀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시간을 갖도록 요청하시는 겁니다. 그 첫머리에 세상의 복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소망해야 할 복을 분명히 하신 겁니다. 오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에 이어서 5절에서 세 번째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실은 이것들이 서로 연결이 됩니다. 우리의 사람됨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인식할 때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성품을 보게 되고,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깊은 죄로 인해 자신의 무력함과 자신이 최선이라고 여겼던 행동과 생각과 의욕에조차도 죄로 물들어 있음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애통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애통함은 우리 눈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자리로 이끌어갑니다. 그 길에 서 있는 자를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은 온유한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뭔가를 소유하기 위해선 능력도 있어야 하고, 자기 확신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강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발 빠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온순하고 순박해 가지곤 당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자들은 늘 소외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한 자들이 쉽게 여기는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길을 보여주시며 이 길을 걸어가는 자가 복이 있다고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언을 통해 예수님은 왜곡된 사람들의 생각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온유한 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헬라어 프라우스는 대게 점잖은’, ‘겸손한’, ‘사려 깊은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 역 성경에서 보면 프라우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니에서 유래한 아나우라는 단어입니다. ‘아니겸손한’, ‘온유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가난한’ ‘괴로움을 당하는이란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런 쓰임새로 구약성경에서 아니아나우는 주로 억눌리고 속임 당하고, 착취를 당하나 이에 무방비한 무력한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곤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5절의 말씀은 시편 3711절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당장 시편 37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더욱이 시 37편에서 온유한 자아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온유함은 단순히 성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점에서 마태복음 55절은 인간의 성품이나 사회학적인 해석, 또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 37편에서 드러나고 있는 말씀 속에서 온유한 자의 모형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온화하고 사람을 잘 이해하며 너그럽고 후덕한, 타고난 인성으로서 온유한 자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관계를 시편 37편은 잘 보여줍니다.

시편 3711절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라 선포할 때 이 결과는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11절의 축복을 위해 1-10절까지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 서서 불의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불의한 자들의 번성으로 인해 불평하거나,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7: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37:7b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에 부딪혀 보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 은행 돈 굴려 더 큰돈 만들어가는 이들, ‘아빠 찬스, 엄마 찬스로 쉽게 앞서가는 이들, 요즘 대장동은 빙산의 일각 아니겠습니까? 이런 꼴들을 바라볼 때 정말 배도 아프고 화도 납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왜 그렇게 초라한지?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불의한 세상을 보면서 시기와 불평과 분을 그치라고 하셨습니다. 37:8a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고, 불평하고, 분을 내다보면 또 다른 악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37:8b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그래서 다 같이 한통속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거룩한 구별이 사라지는 거죠.

그러기에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그냥 자기 분을 꾹 누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화병만 생기고, 우울함이 깊어질 뿐입니다. 핵심은 하나님 앞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잠잠히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불의함으로 인한 번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불의함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37:9a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37: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니 하나님이 행하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14:13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자기 힘과 노력으로 해결하기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이 행하실 거니까요.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러나 세상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손해를 보아도 야단법석을 떱니다. 목숨 걸고 싸웁니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너무도 시끄럽습니다. 이런 환경에 직면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는 분명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앞에서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외부로부터 닥치는 억압과 고난, 불의함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거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대항하는 소모전을 그쳐야 합니다. 그 대결 구도를 끊어내지 못하면 끊이지 않는 싸움으로 또 다른 괴물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신앙으로 쌈닭이 된 많은 이들을 보며 우리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요?

온유함은 단지 외적으로 부드러운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신뢰함으로써 오는 내면의 부드러움입니다. 그래서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신뢰가 무너지면 짜증이 나고, 불평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 결국은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을 신뢰해야만 잠잠히 참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가능해질 때, 참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며 자신의 길을 맡길 수 있습니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기뻐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고 그분 앞에서 잠잠히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진정 그렇다면 그의 입에 불평도, 시기도, 분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되고, 언제나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게 됩니다. 이 삶의 자세가 사람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삶을 베이스로 해서 우리의 온유함이 흘러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온유함의 삶에 하나님은 정당한 보상을 약속하신 거죠. 37: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분명히 그 의지함에 대해 보상해주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마침내 정오의 햇빛처럼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자의 삶은 끝이 아름답습니다. 어둠에 가리어졌던 그들의 삶이. 불의함에 억눌려 있던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37:6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자들은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온화할 수 있는 겁니다. 잔잔한 물결처럼 흔들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온유한 자를 향한 시편 37:11의 말씀을 다시금 새롭게 확대 적용하신 것입니다.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은 과거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배려로 인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듯이, 온유한 자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의미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 대한 보상으로 땅을 차지할 수 있는 현세적인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성취는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축복의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인 겁니다. 온유한 자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 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약속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영원을 향한 소망을 통해 온유한 자들로 생의 목표를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에 두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썩어질 것에 꽂혀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을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작은 보상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는 보상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태도를 결정 짓고 삶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처한 환경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온유한 자의 모습이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때, 이 땅에서 누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 하나님은 결코 방치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들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 온유함의 삶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분의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주님을 통해 어떤 부당한 환경 속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특별히 온유함은 관용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32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온유한 자는 외부로부터 닥치는 억압과 고난에 대하여 거칠게 반발하거나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영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하는 온유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온유와는 다릅니다. 온유함이 겉으로는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인함과 모든 대적을 굴복시키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결국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세 번째 복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늘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함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소중한 것을 영원히 얻도록 하기 위해, 지금 작은 것들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도록 우리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길은 세상의 길과 다른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설사 아무것도 없는 자라 해도, 고린도후서 610절 하반 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자신을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또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루돌프 스티어(Rudolf Stier)자기 포기가 세상을 지배하는 길이다.”라고 했어요.

오늘 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안식의 기쁨을 누릴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은혜가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삶은 이미 천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복의 성취를 위해 오늘 우리 주님의 온유함을 배웁시다. 성령님으로 인해 온유함의 열매가 우리 삶 가운데 열릴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그래야 우리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리스도와 동행할 수 있습니다. 분으로 가득 차 불평하고 남 탓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는 온유한 인생이 될 때, 우리는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는 자로 세상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온유한 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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