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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7절

by 최수근 2021. 11. 21.

2021년 11월 21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으로 다양한 이웃들을 어떤 눈,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대해야 할까요? 용서에 대해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2) 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다른 이를 대하는 마음이 따뜻하고 넉넉할 수 있을까요? 말씀과 실제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그러신 것처럼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십니다. 마태복음 57절에서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맛본 인간으로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의 사전적인 의미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라함과 헤세드를 사용합니다. 이 중에 헤세드는 보답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사랑,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 드러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실제로 행동하여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긍휼의 최고점은 십자가에서 드러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긍휼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들이 긍휼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죄지은 자를 정죄하고,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고자 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 경건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못 본 체하고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자기들의 거룩함을 위해 죽어가는 자를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신앙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신을 위한 신앙일 뿐입니다.

이렇게 긍휼을 잃어버리면 정죄와 비판과 배타주의로 중무장한 극단적 풍조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이와 같은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긍휼을 잃어버린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모순입니다. 긍휼 없는 기독교를 세상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완악하고 강퍅한 교회와 세상을 향해 타인을 향한 긍휼을 강조하셨고, 긍휼의 마음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라고 하셨어요. 그 점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권하는 긍휼은 일상적인 사람들의 친절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성품이며, 성령의 열매이고,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다면, 그 긍휼하심을 보면서 우리도 긍휼히 여겨야 할 이들을 외면할 수 없는 겁니다. 긍휼은 단순한 연민의 정이 아닙니다. 자기를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동일시하는 능력입니다. 저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아무것도 아님을 보면서 그렇지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입고 다시 살아난 자기 자신을 그 사람들 속에서 볼 수 있을 때,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해서 처음부터 주님이 보여주신 긍휼의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거듭났어도 여전히 옛사람이 살아있어 긍휼의 마음이 무시되고,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다투고, 수없이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안에서 진정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한다면 긍휼은 우리의 삶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고, 확장되고, 지속될 것입니다.

요셉을 보면 어린 시절에는 형들을 고발하는 자였습니다. 형들이 볼 때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살해위협을 받고 결국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곳에서 죽을 고생을 했지만, 자기의 비참했던 삶을 형들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었다며 형들을 용서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왕에게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살해위협을 받아 피해 다닐 때 다뒷은 사울 왕을 여러 번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기도 했지만, 다윗이 사울을 긍휼히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긍휼은 자신이 손해를 보고, 어려움을 당해도 그렇게 만든이들을 용서하고, 품어주고, 기도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없다면 끝까지 그들을 벌하고, 심판하려고 애를 쓸 겁니다. 그런 이들일수록 사회적인 정의, 하나님의 공의를 들먹이곤 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냐? 사기를 당했고, 손해를 보았으면 정당한 자기 권리를 행사해서 찾을 것은 찾아야 하고, 벌할 것은 벌해야지!” “그게 정의 실현 아니겠어하나님의 공의로 풀어가자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을 우리는 어떻게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셨는데 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우리이었으니까 그런 자신을 본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되 효과적으로 실천하려고 한다면 언제나 긍휼과 정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범법자를 개인적으로 긍휼히 여겨서 용서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의 심판은 심판이고, 개인에 대한 우리의 긍휼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긍휼이라고 죄를 용납하거나 불의를 눈감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노예 된 무능한 자를 불쌍히 여김으로 저가 구원받을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죄하기 바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긍휼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처럼 하려면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겁니다. 환경에 따라 정도는 달라지겠지만 긍휼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일상에서 매일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은 작은 자에게 물 한잔을 대접하는 일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거나, 수많은 재산과 재능을 가난한 나라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일까지 다양함의 형태와 정도를 가지고 매일 같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대개는 매우 평범한 행동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일상에서 긍휼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누군가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는 일이기도 하고, 격려의 말 몇 마디를 건네주거나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하고, 어려운 이에게 인색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호의를 베풀고,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들추거나, 다른 사람의 실패를 이용하지 않고,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난처한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기도 하고, 누군가의 죄를 함부로 떠벌리지 않고, 누군가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설령 빚을 갚지 않거나 빌린 것을 돌려주지 않더라도 그를 용서하는 이것들이 바로 긍휼의 마음으로 사는 법입니다.

그 점에서 긍휼은 다른 인간에 대한 헌신이며, 때로는 고통과 고뇌, 물질적인 대가까지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상대방이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굳이 줄 필요가 없는 것까지 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불쌍한 자들의 일시적인 궁핍함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려고 하는 자연적이며 본능적인 친절과는 그래서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긍휼히 여기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복입니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자신의 삶으로 다 되돌아옵니다. 물론 이것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긍휼히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서 긍휼을 거두어 버리실 거라는 두려움이 곧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동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7절 말씀은 우리가 긍휼히 여김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 긍휼의 필연적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자신의 긍휼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면 그것은 참된 긍휼, 헤세드가 아닙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만 긍휼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의 강조점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에 그 긍휼하심을 본받아 우리의 삶에서도 긍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순서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진정으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고, 우리가 계속해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다면,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오늘 우리가 죄로 인해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에 우리도 이 땅을 살아가며 긍휼의 옷을 입고, 긍휼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부담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힘만으론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아가고자 할 때 오늘 성령께서 긍휼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만져주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용서와 긍휼보다는 보복과 심판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에게 용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자들을 대표하는 이가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의 주인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 빚을 탕감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긍휼을 입었지만 자기의 것을 돌려받기 위해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합니다.

32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이렇게 긍휼을 잃어버린 삶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부터 영원히 소외되고 맙니다.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러나 우리가 만일 오늘 이 시대에 자신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길을 걸어간다면 마지막 그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로 대하실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모든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까? 언제든 돌을 들어 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긍휼이 흘러가야 할 그 자리를 슬쩍 외면하며 피하는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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