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구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 히 2장 10-18절]
역사적인 인간 예수의 참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많은 시도가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성경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다 제거하고 나면 남은 인간 예수야말로 참 예수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인간 예수를 찾아서 우리에게 주장하고자 하는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죠. 단지 예수를 급진적인 윤리 교사라고 부르고 싶은 겁니다. 진정 그렇다면 예수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 믿음과는 전혀 무관한 겁니다. 단지 지적인 영향력을 좀 끼칠 수 있는 역사 속의 한 인물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천 년 전 유대 땅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사상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심각하게 충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한계 안에 갇히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그들이 꿈꾸던 메시아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 있냐는 거죠. 유대교 상층부의 사람들에겐 예수님은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급진적인 한 인물일 뿐이었습니다.
유대교의 광범위한 영향권 안에 있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과거 그들이 갖고 있던 잘못된 생각을 깨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보도록 외치고 있습니다. 제한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필터링 된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인해 많은 믿음의 오류들이 발생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믿음의 가장 좋은 정의는 내가 이해한 바가 아닌 하나님이 계시하신 바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해석하려고 하는 오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엄청난 “큰 구원”을 이루어가고 계신 데, 인간들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꿈이 아니어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그려가시는 큰 구원을 볼 때, 기독교는 진정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를 어느 순간 상실하고 말 거예요. 100% 확률로!!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는 큰 구원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큰 구원은 단순히 인간들이 꿈꾸는 해방이거나 웰빙의 수준이 아닙니다. 웰빙에서 고난, 낮아짐, 자기 비움, 자기 내려놓음은 환영받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구원은 예수님의 낮아지심, 자기 내어놓음이라는 모든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하나님은 죄로 가득한 인간을 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가시기 위해 고난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고난받고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완성될 수 없었겠지요.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습니다. 창시자를 헬라어로 ‘아르케고스’라고 합니다. 아르케고스는 남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아르케고스라는 말은 우리가 뒤따라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유일한 지도자요 안내자인 아르케고스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지도와 안내를 받는 사람들만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고난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십자가의 수난 가운데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건 그 당시 유대교가 볼 수 없었던 그림입니다. 그들은 이 땅의 정치 세력으로부터 해방이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자를 그들은 열렬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허무하게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다 끝난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끝났다고 할 때 하나님은 다시 일하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했듯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고자 하셨습니다. 달라도 너무도 다른 목표입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기대치가 다를 때 늘 문제가 일어납니다. 지금 하나님은 큰 구원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는 겁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사로잡혀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자들을 해방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셔서 죽으셨고, 마침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거죠. 죽음을 이겨냄으로써 인간에게 부활의 소망을 심어주셨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무너뜨리신 겁니다. 기독교는 해방을 말하고 있지만, 단순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것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단지 보이는 것에서 자유함을 누리기를 기대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의 큰 구원은 근본적인 인간의 해방을 목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편으로써 기독교인 된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전인적인 구원을 위해 구원의 창시자, 아르케고스로 세워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죄와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다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건 지배가 아닙니다.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거룩한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히 2: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런데 어떤 자들을 붙들어 주신다고 하셨나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혈통적인 유대인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큰 구원의 목적을 위해 예수님은 고난받기를 기뻐하셨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 죄를 속량해주셨습니다.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 주님이 맡으신 큰 과업입니다. 오신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죄인 된 인간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하나님과 화목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고, 믿는 자들을 위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신 겁니다.
우리 죄를 속량하신 목적은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목적으로 우리를 회복시키고자 하심입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는 것입니다.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막혔던 길을 열어주셨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할 때 허공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특별하게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우리 홀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주십니다. 요일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우리를 알고 이해해 주시는 대언자, 중보자가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대언자이신 예수님은 변론뿐만 아니라 시험받을 때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히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구원받은 이후에도 사탄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넘어뜨리려고 줄기차게 공격해옵니다. 세상이나 마귀나 죄나 시험 자체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때 우리 홀로 있다면 능히 방어할 수 있을까요? 죄에 빠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홀로 있지 말아야 해요. 예수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분입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셨기에 우리가 시험받을 때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의 아르케고스가 되셔서 우리를 회복하고 자유 하게 하시고, 우리 가까이 계셔서 능히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겪으셨기에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항상 살아서 온전히 끝까지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는 전부 채워졌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충만히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무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대신 필요한 일을 해주신 분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아르케고스가 되시어 우리 앞에 계십니다.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작은 기대치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배하신 큰 구원의 선물을 유기하지 맙시다. 하찮은 것으로 인해 눈이 멀어 참으로 고귀한 것을 잃어버린다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가고 계신 큰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구원의 계획 안에 서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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