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6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아들 예수를 통해서 말씀하시다: 히 1장 1-3절]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기면서 새롭게 등장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도어스테핑입니다. 대통령이 출근하면서 1층 로비에서 기자들과 바로 만나 질문에 답하는 건데, 이때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대통령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과 대변인이나 주변 비서관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말의 권위가 다르기 때문이죠. 그러니 기자들이 대통령의 말에 아침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듣고 신뢰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막 나오는 대로 이야기하는 유튜버의 말을 믿고 신뢰하기란 쉽지 않은 거죠. 어떤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신뢰합니까?
말의 권위는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서 옵니다. 그가 누구인가에 따라 그 말을 경청할 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듣던 이들의 반응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많은 유대인이 서기관, 랍비 등을 통해 율법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가 나와 긴 시간을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말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거죠. 그것은 느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가 되고, 듣고 지켜 행하지 않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가 된다고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결과를 통해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전에도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전 에덴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출애굽 이후 율법과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은 인간과 계속해서 소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소통을 외면하였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긴 시간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그래서 말할 때 “와요메르 아도나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라는 선포형식을 통해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말에 신적 권위를 부여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허물어져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오랜 침묵 후에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아가 열방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이 서신은 기독교 계시의 가장 위대한 한 사실을 주장함으로써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말씀하실 것이라는 선포였습니다.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류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메워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형성된 건데, 그건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의사소통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아들을 통해 말씀하심으로 그 간극이 사라진 겁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직접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권위가 달리 느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히브리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할 때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스도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말씀의 권위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여야 합니다.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우리가 끝까지 설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부터 힘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실은 히브리서의 목적이 이 바로 이와 같은 위험성을 제거하고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로마 제국과 유대교의 회유와 박해로 인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다시금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존귀함을 일깨워 신앙의 흔들림을 막고자 하는 데 목적을 갖고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교사, 영감 있는 가르침을 전한 스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훌륭한 교사이시고 영감 있는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이 되시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매 순간 확인하고 그분에 대한 고백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결코 우리 귀를 돌리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유의 후사, 상속자로 세움을 받으셨다고 선포합니다. 아들은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유산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들로서 상속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동참하셨기 때문입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가 우주를 자신의 손으로 어루만지시고 성운을 불러 존재케 하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은 확실히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의 때를 겪을 때 붙들어 주시고, 힘든 시기를 지날 때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창조 이전의 혼돈을 극복할 수 있으셨다면 분명히 우리들의 운명을 다스리시고 우리들의 다급한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겁니다.
나아가서 3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과 땅에서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장엄하신 임재가 눈에 보이게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영광’은 그 산 위에 머물렀습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분이 계속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 하신다는 가시적인 상징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마지막 날에 바로 가시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 영광의 광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광채의 장엄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예수님에게 부탁드릴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의 형상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광의 광채이시며 창조자이시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고 계심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제한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한정된 경험과 제한된 지식 안에 가두어 두려는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한된 틀을 깨고 광대한 우주적 차원을 가지신 그리스도, 그분에 관한 우리의 가장 고상한 생각과 가장 훌륭한 경험까지도 초월하시는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1세기의 히브리서 독자들이 경배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그들은 자신이 겪는 힘든 상황에서도 예수님에게 결코 등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정 우리의 구원이시고 능력이시고,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아들이시고 상속자이시고 창조주이시고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와 피부적으로 잘 와 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를 직접 연결을 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결코 자신을 위해 스스로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을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몸으로 행하셨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구원도 없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오셔서 구속의 죽음으로 사람들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구원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완성되고,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우리 주님은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위에 오르셨고, 우리의 모든 경의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믿음의 길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믿음의 실체는 희미해지고, 허구만이 그 안을 채워 공허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곤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붙잡아 주는 기준점이 명확하게 세워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준점이 흔들리다 보면 그 자리에 새로운 우상이 자리 잡곤 하는 것이죠. 다시 우리는 기준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안에 예수님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 고백되어야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우리 예수님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한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한 분이십니다.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엡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신앙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선을 오직 예수님께 고정해야만 합니다. 사탄은 언제든 우리를 다시 과거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우리는 겉은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자리로 전락 되어 의미 없는 신앙의 삶을 살아갈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누구신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그분을 통해 이루시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멀어지는 순간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통해 이 마지막 날에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과 우리의 구원은 견고하게 서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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