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0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주기도문(II): 마태복음 6장 9-15절]
마음을 온전하게 나누지 못하면 사람들과의 소통은 겉돌게 됩니다. 마음을 열어 나누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깊어지고, 지속되려고 하면 자신의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도록 가르친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기원을 통해서 우리의 가장 우선적 관심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 진정성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우선적 사항을 간구한 후에 비로소 우리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향하는 것이죠.
우리를 위한 첫 번째 간구는 놀랍게도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다 더 영적이고 고차원적인 것을 먼저 구하지 않고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하셨을까 의아해하였습니다. 마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탄에게 당당하게 말씀하신 예수님이라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간구를 자꾸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이 매일같이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데 있습니다.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는 단순히 우리의 양식을 채워달라는 요청만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양식”이라는 표현을 단순하게 먹거리로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이 “음식, 건강한 신체, 좋은 날씨, 집, 가정, 아내, 자녀, 좋은 정부, 평화 등과 같이 이생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이해했던 겁니다.
11절에서 ‘일용할’이라고 번역되는 단어 ‘에피우시오스’라는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입니다. 저는 이 ‘일용할’이라는 말을 가장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루 양식으로 한 오멜의 만나를 주셨던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하루에 먹을 수 있을 만큼인 한 오멜씩 거두어야 하고, 다음 날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이 또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출 16:4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출 1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게 할 것이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의 분량을 축적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보니까 만나가 든 그릇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 점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오늘의 기본적인 모든 필요를 위한 기도이며, 하나님의 지속적인 채우심을 위한 기도이자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매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탱하고 유지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바로 이 신뢰가 무너지면 그때부터 내가 뭔가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인 우리에게 자기 능력으로 또는 주변의 다른 것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런 시도를 당장 내려놓으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주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우리의 모든 필요를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 앞에 날마다 겸손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선은 우리 이웃을 향해야 합니다. 더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의 채우심을 위해서도 중보 기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면 중보해야 할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전쟁의 참혹함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도 그들의 필요와 안전이 매일 매 순간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저들의 모든 필요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나만의 이기적인 영역을 넘어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기도로 확장됩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삶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에 이어서 예수님은 두 번째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셨습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간구는 매일 근본적인 우리 구원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번째 간구는 일상에서 범하고 있는 죄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의심하고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을 받아 성도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여 죄의 유혹 앞에 다시 무릎 꿇곤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미 죄 사함을 받았으니까 이것들을 퉁 쳐버릴 수 있는 걸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 범할 모든 죄까지도 사해주신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뭘 해도 다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사악한 생각이고 기독교인들을 참으로 뻔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범하고 있는 우리 죄를 사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진실한 마음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십니다. 이건 약속입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피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정결하게 하는 피를 힘입어야만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도는 예수님의 의를 힘입고자 하는 간절함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실은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죄의 문제를 내일로 넘기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간구를 놓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주어야만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12절 말씀과 여기에 부연 설명된 14~15절을 얼핏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14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절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과연 하나님의 용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성도로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너희가 너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마음의 완악함을 참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데 무게중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정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자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되고 가증한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의 조건인 회개가 충족되지 않는 한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실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자 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완악함으로 인해 용서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것을 믿지 못하고 거부할 것입니다. 주변에서 이런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아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용서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죄의 은총을 받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선행되어야만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인정하시고 나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매일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은 자로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세 번째 간구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우리는 매일 유혹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기치 못한 유혹들이 우리의 방심을 틈타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날까요? 우리가 틈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사탄이 공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면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사탄의 사정권 안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께 매일 매 순간 사탄이 던지는 미끼를 덥석 물지 않도록 그 유혹에 맞설 수 있는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힘만으로 유혹에 맞선다면 유혹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끝내는 이겨내지 못하고 실족하여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우리 시선을 돌린다면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으로부터 강력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너무 쉬운 문제로 보지 마십시오. 지금 이 땅에 모든 악이 사탄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상의 작은 악으로부터 많은 이들의 삶을 비참하게 파괴하는 전쟁까지 악은 준동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탄의 이와 같은 모습을 우는 사자에 비유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영적 전투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 후에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그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치신 예수님은 그 악의 권세를 가볍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능력을 날마다 구하라고 명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능력만이 시험에 들게 하는 사탄의 유혹과 그들을 넘어뜨려 지배하고자 하는 사탄의 모든 권세로부터 제자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토록 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예수님께서 처음 우리에게 전하신 이래로 참으로 긴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로 지금 이어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정확히 이 기도대로 기도하라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즉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나의 삶과 연관된 말들로 채워야 합니다. 간절한 이 소망들을 나의 언어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위선적인 것과는 다르게 진지하고, 기계적인 것과는 다르게 사려 깊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주기도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모범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의 시간이 우리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2:2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지금도 우리는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영원한 왕이시며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항상 신뢰하십시오. 필요를 위해 더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입었다면 다른 이들을 먼저 용서하십시오.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이렇게 아버지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고자 하는 삶이 모이고 모여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 합당한 영광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소통 안에 언제나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입술을 열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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