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30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말, 말, 말 : 마 5장 33-3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20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수많은 공약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공약을 보면 참으로 화려합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당선자는 기대해볼 수 있을까요? 비단 정치인들뿐만 아닙니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책임지지 않고 함부로 말하고 사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책임지지 못 하는 말들이 난무하다 보니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건축물이 무너지고, 산업재해로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 대형화재가 나서 많은 이들이 희생될 때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경영진들이 머리를 숙이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극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진실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장으로써 언론 또한 자기의 이익을 우선하고, 거짓 뉴스를 퍼 나르기에 바쁩니다. 가뜩이나 경쟁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 주력하고 있는 정치 현장은 우리 사회에서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도록 위협하는 진흙탕이기도 합니다.
이런 불신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말이 많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이게 좋은 소리는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실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맹세도 하고 말도 많았지만, 삶의 현장에서 실행되기보다는 허공에 그 말들이 흩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맹세나 서원을 남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의를 과시하거나 자기를 믿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여 어떻게든 믿게 해보려고 맹세를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질 수 없는 맹세나 서원은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오히려 맹세하고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 죄라고 하셨습니다.
신 23:22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잠언 말씀에서는 입을 지키는 것이 생명과 직결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잠언 17:3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이것은 오늘날 쉽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 앞에서 결심도 하지만 너무도 쉽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곤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여러 말씀을 통해서 맹세와 서원은 존중되어야 하고,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신 23:21 “네 하나님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이 계명들을 보면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거짓된 맹세와 위증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임의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율법에서 허용했습니다.
신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맹세하는 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의 맹세대로 실행하기를 목적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다면 반드시 지켜야 했고,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되었던 겁니다. 3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맹세를 반드시 지키도록 하여서 사람들이 함부로 맹세하지 않도록 하고, 자기의 의를 부각하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필요한 경우에만 행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율법과 같은 맥락에서 유대 사회 속에 만연된 맹세와 서원의 잘못된 관습을 지적하셨습니다. 마 5:33~34a “또 옛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데 그 말씀이 무슨 문제가 있기에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들이 알고 지켜왔던 33절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맹세에 대해 신중함과 사람들이 내뱉은 말에 대한 신실한 실천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 랍비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들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맹세에 관한 율법을 단지 거짓 맹세를 금하는 것으로만 제한시켜버렸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맹세만 아니라면 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맹세에 대한 부담과 구속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맹세에 관한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한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계명을 어기는 큰 죄였습니다. 이에 랍비들은 맹세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들을 찾았습니다. 이들에게 맹세와 그것을 지킬 필요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맹세할 때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어떤 표현을 허용할 수 있을 가에 골몰한 결과, 하늘과 땅, 예루살렘과 성전 등으로 맹세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랍비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는다면 만에 하나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맹세의 책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겁니다.
그들은 이 계명을 위증죄 하나에만 국한 시켰습니다. 헛되이 맹세하지 않는 한 사람이 아무 때든 맹세하는 것은 해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더욱이 사람들이 헛되이 맹세하지 않는 한 하늘과 예루살렘, 심지어 자신의 생명 등 다양한 사물을 걸고 맹세하여도 구속력이 없다고 해서 아무 때든 무슨 문제든 맹세를 남발할 수 있는 문을 열어버렸습니다. 진중해야 할 맹세가 참으로 가볍게 취급되었고, 사람들 간에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말이 사용되든 상관없이 약속은 하나님 앞에서 구속력을 갖기 때문입니다. 맹세와 서원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지키기 위한 것인데 율법을 연구한다는 자들이 이런 장난을 쳤고, 바리새인들은 이걸 계승하여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은 죄의식 없이 일상 대화에서 맹세를 남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맹세가 남발된 결과 상호 간에 신뢰할 수 없는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맹세의 구속력으로부터 도망갈 구멍을 찾는 것 자체가 악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동으로 보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와 같은 잘못된 맹세의 관습에 대하여 무엇이 중요한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34절 a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맹세를 전면 금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유대 사회에서 잘못된 맹세의 관습에 따라 맹세를 함부로 남발하지 말고, 그것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주신 의도는 맹세 자체가 아닙니다. 말에 진실함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는 맹세로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그 형식에 매어 달렸던 겁니다.
34절 하반 절부터 37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관습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맹세를 어떤 이름으로 하느냐에 따라 구속력을 갖는지 분류하는 것 자체가 완전히 인위적이라고 보신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애써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어떤 것에서도 하나님을 가리 울 수 없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율법이 목적하는 건 서원을 한 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 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맹세에 대한 가벼운 태도가 얼마나 경솔하고 죄악 된 것인가를 지적하시면 헛된 맹세를 금하셨던 겁니다.
더군다나 맹세의 출발점이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다면 더욱 과장되고 결국 그 맹세가 거짓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집니다. 맹세를 남발하는 이들을 보면 대개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악입니다.
레위기 19장 12절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수님이 남용되고 있는 맹세를 강력하게 멈추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맹세의 관습에 젖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진실하게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마 5장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말씀은 야고보서 5장 12절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37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실은 할 수 없는데도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토를 달면서 자기가 마치 할 수 있는 것처럼 장황하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런 순간이 실은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이걸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결국 거짓된 자로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장황한 말을 남발하는 것은 그들의 일상이 거짓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의 화려한 향연으로 자신의 거짓을 덮어보려고 하는 거죠. 지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가 불신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나없이 말만 앞서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도 한몫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이 교회의 말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정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말의 책임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건 그 어떤 맹세 없이도 자신의 진실함을 보여줄 수 있는 신실한 삶 안에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잘못된 맹세를 멈추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의와 위선적인 삶에 빠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하기 위해 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말에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참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일에 매우 필요합니다. 짧고 단순한 말만으로도 분명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단한 표현을 맹세에 덧붙여서 상대방으로 믿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모든 수사학적인 표현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화려한 레토릭에 의지하면 할수록 우리의 언어는 빈껍데기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어떤 표현이 사람들을 믿게 만들 수 있을까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단순한 말 한마디라도 실은 그 말에 진솔함이 담겨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말이 짧고 단순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에 신실함을 지금까지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말씀에서 맹세 자체가 아니라 성실함이 주된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맹세는 결코 개인적인 성실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쟁이의 맹세는 무익한 약속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이 ‘예’나 ‘아니요’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단순한 말은 신뢰받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성실함을 우리의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맹세보다 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예나 아니요로 말해도 충분히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말 한마디가 계약서처럼 신뢰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지금 세상에는 말을 너무도 쉽게 바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진실이란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실제가 정확하게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겉은 진실한 자세로 진실한 내용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마음속에 거짓을 품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벗어나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언제나 신실함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배울 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진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일 3장 18절에서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러나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이 행함과 진실함이 담기지 못한 말을 함으로써 신뢰를 잃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말을 할 때나 맹세를 할 때 우리는 그 순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임재를 나타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더욱 진실하고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약속을 지켜야 하고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충실한 사람이 되도록 요청하십니다. 믿음을 주지 못하면 결국 아무리 소리 높여도 외면당하고 말 것입니다. 오직 말의 신뢰가 이루어질 때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거짓이 난무하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진실하고 신실한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우리에게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믿음이 회복될 때 참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는 말과 행동의 수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자가 되어 복음이 흘러가는 통로로 세워져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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