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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죄 짓는 눈과 손을 제거하라: 마 5장 27-32절

by 최수근 2022. 1. 23.

2022년 1월 23일 주일설교동영상

[죄 짓는 눈과 손을 제거하라: 마 5장 27-3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율법의 본래 의도는 사라지고 단지 행위에만 치중하고 있다면 온전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보이는 것만으로는 참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겉과는 달리 속이 다르다면 그건 속임이고 거짓입니다. 우리의 성장과 성숙에서 가장 큰 방해물은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위선과 외식이 더욱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의 문제를 중요시하셨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 우리를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15: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지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곤 합니다. 로마서 722~24절에서 바울은 그런 내적 갈등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도 신앙 생활하면서 이 싸움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이 문제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7장은 자기 의로 의로워지고자 하는 이들의 반복되는 갈등 국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적 싸움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넘어설 수 있습니다. 나아가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로워지는 것이 아님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단순히 행동에 국한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이루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대단하게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적인 자기 의로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의와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의로 덧입혀지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마태복음 521절부터 율법 교사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고 적용되었던 율법을 하나님 나라 의의 기준으로 새롭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하는 해석이야말로 인간의 교만이고, 자신의 욕심을 채워가기 위한 더러운 작업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종종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우리에게 더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27~32절까지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제7계명을 다시금 해석해주심으로써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어가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제7계명을 두신 이유는 부정적인 의도보다는 서로 돕는 배필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가 상호 간에 언약을 잘 지킴으로써 올바른 관계를 이루어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간음은 충실하고 진실한 부부의 관계,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관계를 일순간에 무너뜨려 버립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아름다운 질서를 허물어버리는 악한 행동이기에 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목적과는 달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단지 계명의 범위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간음을 했느냐에만 초점을 맞춘 겁니다. 간음이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설령 마음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칠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외식하는 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내면이 어떻든 간에 겉으로 보이는 거룩한 행동에 치중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이들은 7계명도 단순히 육체적 간음행위의 차원으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행위로 범하지 않는 이상 7계명이 그들과 상관이 없고, 이 계명에 관한 한 그들은 완전히 무죄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음란한 생각들에 대해선 면죄부를 주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중심, 곧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부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의 의미를 정확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했던 내면의 거룩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27-28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죄의 출발을 행동으로부터 보신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음욕을 품은 순간부터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한 행동들을 보면 대부분 마음의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먼저 출발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마음의 중요성을 잊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점점 더 위선적이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리적인 시선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행동 또한 예배로 봉사로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수많은 우상들을 바라보고 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그것이 구약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영적인 음란함이요 간음입니다. 내면은 무시하고 외면의 형식적인 거룩함만으로 나아갈 때 그 예배는 거짓된 예배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이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은 도덕적인 노력과 이상적인 목표를 향한 열성적인 수고와 계명들과 금령들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인간적인 힘을 다해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오르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참담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의란 자기들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의 도덕적인 정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명령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도 먼저 썩어 있는 우리 내면의 환부를 도려내도록 강력하게 명령하셨습니다.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이것이 영적 할례이며 죄의 통로를 제거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44: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할례는 내가 의지했던 것들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부인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선 그 어떤 것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이 불가능합니다. 29~30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로 죄를 범하게 하는 오른손과 눈을 잘라내고 빼어내라는 것도 문자적 명령이 아니라 엄격한 자기 부인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대로 해야 한다면 참으로 혹독한 것입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거듭났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몸이 과거에 익숙했던 습관들로 회귀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 새로워진 성향이 우리 안에 들어오더라도 우리 안에는 참으로 견고한 진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옛 사람의 지배 하에 있던 것들을 잘라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과 생각입니다. 우리 내면이 거듭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손과 발이 구별되겠습니까? 마음은 그냥 그대로 방치하고 손과 발을 잘라낸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신체를 잘라낸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3세기의 오리게네스 같은 경우는 정욕을 이기기 위해 금욕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세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육체의 해함, 자해를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가지치기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의 진보 가운데 죄를 짓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우리에게서 잘라버리라는 것입니다. 매장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더는 우리를 헛된 곳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힘을 쓰지 못하도록 완전히 끊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끊어내지 못하고 그냥 죄를 지으며 산다면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 자명하니 오히려 범죄 하게 하는 눈을 빼거나 혹은 손을 잘라내고 장애인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삶의 죄 된 요소들을 참으로 관대하게 대하곤 합니다. 그러면 더욱 상황이 나빠질 뿐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 습관, 활동, 관계 등을 과감하게 제거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십자가에 자신을 날마다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고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2:20a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물론 우리가 영광스러운 새 몸을 갖기까지는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일상에서 죄에 빌미를 주기보다는 매 순간 우리에게서 죄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끊어내지 않고 육신대로 살면 결국 죄로 인해 우리가 죽습니다. 하지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를 죄로 이끌어가는 것들을 찾아 단호하게 끊어내십시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끊어내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부부의 관계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혼은 남자의 주도로 아주 쉽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41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이 말씀에 따르면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었을 때와 같은 조건에서 이혼하는 경우 이혼 증서를 주고 갈라서라고 하셨지만, 실은 이것이 이혼을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조건이 예수님 당시 시대에 와서 확대하여 해석되면서 이혼 증서를 주기만 하면 너도나도 이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음식을 태워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 이혼 증서를 주고 쫓아내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편리 한대로 악용한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여자를 얻기 위한 탐욕을 채우기 위해 말씀을 악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행동들을 강력하게 막아섰습니다.

31-32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얼핏 들으면 특정한 경우는 이혼을 허락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히려 다른 목적을 들어서 이혼하는 것을 금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2010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상황에서는 자기 아내를 버리고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한번 맺은 혼인 관계는 어떤 이유든지 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 196절 하반절에 가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 더욱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혼인 서약은 인간관계의 모든 기쁨과 어려움을 아울러 관통하는 사랑의 성실성을 상징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혼은 정말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혼이 불가피한 때도 있습니다. 부정, 무관심, 학대, 대화의 단절 등으로 말미암아 더는 결혼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파경에 이른 결혼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경우들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 이혼은 최악을 피한 것뿐 아니라 하나의 실제적인 조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깨는 일이야말로 다분히 탐욕적인 경우들이 더욱 많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도 남자들이 다른 여자들을 얻기 위해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헤롯왕도 그 부류에 속합니다. 이것은 탐욕스러운 마음의 결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31~32절의 말씀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이혼 증서를 오용하는 사람들, 즉 자기들의 음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혼 증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보다는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 착각에 빠진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얼마나 율법에 철저했고,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노력을 했습니까? 그 열심만큼은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위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하기 위해선 이와 같은 이들의 위선적인 삶을 끊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세상의 탐욕적이고 음란하고 정욕적인 문화와 생활을 의도적으로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 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를 편협하고 무지하고 교양 없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전인적인 삶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불구가 되기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기꺼이 그런 상실을 이기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이 일이 시대에 뒤처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꼴통 보수도 극우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지체를 잃어버리고 불구인 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을 이끌고 지옥으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세에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약간의 문화적 단절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것인지? 세상 사람들을 따를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위선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세상 속에 은근히 묻혀 세상을 즐기며 살아간다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아가다가 결국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매일 십자가에서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 가운데 서야 할 것입니다.

비록 세속문화의 패러다임으로 볼 땐 불구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가 그 의로움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거룩함의 영향력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가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날마다 우리로 죄에 이르게 하는 눈과 손 발을 잘라냅시다. 우리의 부르심은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함께 부르심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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