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6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분노는 살인이다: 마 5장 21-26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배의 자리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자리입니까? 예배는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청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자리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우리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왜곡된 신앙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순전한 믿음으로 나가기보다는 편집증적인 자기 고집스러움이 더덕더덕 묻어있는 종교적 신념으로 굳어져 가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경건함도, 거룩함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서 이와 같은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율법의 수호자라는 신념 가운데 자신들만이 가장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율법 교사로서 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처럼 행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천국은 자기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의도를 잊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 어긋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종교지도자들의 가증스러움을 깨뜨리시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져야 할 “의”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 5:20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입니다. 이들의 수준과 같은 종교적인 탐닉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란 어떤 것일까요? 이들이 행하는 열심보다 더 열심을 갖고 율법을 지켜내는 것일까요? 저들이 기도하던 횟수보다 더 많은 기도, 더 많은 금식을 해야 하는 걸까요? 이건 단지 자기만족과 위선으로 점철되는 허무한 길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어리석게도 율법의 의로 행하려 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갈 수 없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길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1절로부터 48절까지 말씀에서 여섯 가지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드셨습니다. 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 사랑과 같이 우리가 살면서 흔히 접하는 상황에 대한 양자 대비를 통해, 어떤 대비인가 하면 “행위”만을 강조하는 저들의 십계명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을 대비하여 주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사는 이들의 내면의 성품과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확연히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산상수훈 첫머리에서 팔복을 말씀해주신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자 하신 겁니다.
오늘 말씀은 십계명의 제육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은 단순히 사람 죽이는 일을 멈추라는 행위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참 의도는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 존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제육 계명을 살인이라는 행위에만 적용하였습니다. 살인하지 않는다면 이 계명을 지켰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말하는지에 대한 것과 그로 인해 상대방이 겪어야 할 다른 상황들은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직접 사람에게 위해를 가해 그 생명을 해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견해와 완전히 다르셨습니다. 살인의 범주는 단지 물리적인 생명 탈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1, 22절 “내가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에 대한 범주를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죽게 하는 감정과 말, 사람을 향한 분노와 멸시와 욕설까지도 제육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 하셨고, 이 모든 것을 심판의 대상에 포함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이 본래 계명의 목적이고, 분노와 멸시, 모욕적인 언어폭력이야말로 한 인격을 죽이는 일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분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수없는 인간의 악행을 살펴보면 거기엔 분명 분노가 얽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분노를 통해서 형이 동생을 살해하는 불행한 사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분노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살인이 있었습니다. 분노가 비극의 출발입니다. 내면에 품은 분노는 우리 인격과 삶을 파괴하는 힘이 있습니다. 서로를 분노에 내어 줄 때, 악은 순식간에 비참한 결과를 쏟아 냅니다. 나아가 모든 피해자의 마음에 또 다른 분노와 자괴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사람들은 분노를 산더미처럼 품고 다니는 걸까요? 자신을 분노케 한 대상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직간접적으로 해를 입히고, 나아가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내상을 입히는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만듭니다.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리스도인에게 분노는 마귀에게 틈을 열어주는 길이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질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산산조각이 나는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하고 있어요. 엡 4:26, 27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향한 최우선의 기본 단계로 우리 안에서 분노를 제거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형제를 멸시하는 태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대표적인 멸시의 단어는 “라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람어 라가는 상대방의 지성을 모욕하는 것으로 ‘머리가 빈’ 자라는 의미인데, 예수님 당시에 상대를 경멸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며 멸시의 표현으로 흔히 사용되던 말입니다. 누군가가 자기에게 ‘멍청이’, ‘바보’, ‘얼간이’라고 말하면 기분 좋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음이 순간 상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것 또한 인격 살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형제를 ‘라가’라고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된다고 하셨는데, 오늘날로 치면 명예훼손죄로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어요.
멸시는 고의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행동입니다. 이런 멸시는 우리 삶 속에 분노보다 은연중에 더 만연해 있습니다.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치밀하게 소외시키는 일은 안타깝게도 세상에 늘 있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바라보는 눈길과 결이 같은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에 물들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자기만이 훌륭하다고 믿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멸시의 의도와 결과는 언제나 상대를 배제 시키고 밀어내고 따돌려 소외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 점에서 멸시는 분노보다 더 심하게 사회적 유대관계를 깨뜨립니다. 멸시는 그 자체로 악합니다. 존재 자체로 인간의 영혼을 고사시킵니다.
분노와 멸시는 이 땅의 재앙입니다. 분노와 멸시의 실체를 바로 알면 역사와 삶이 우리 앞에 끝없이 쏟아 내는 인간의 비극적인 실체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분노와 멸시를 뿌리째 뽑는 것이야말로 악을 이기고 승리 하는 길입니다. 바울이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살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내면의 수많은 악을 말씀하시면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십니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은 특유의 섬뜩한 멸시와 살벌한 분노를 한 데 담아 “미련한 놈”이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분노나 멸시 자체보다 피해가 훨씬 큽니다. 성경에서 미련한 자란 어리석은 고집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 그리고 지각 있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모든 것에 역행하는 자세를 총칭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완고하게 비뚤어져 반항하고 알면서도 악을 행하여 해를 자초하는 자입니다. 결국 “지옥에나 떨어질 놈”이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의 가망이 없다는 선언 아니겠어요.
이런 의미로 누군가에게 딱지를 붙이는 것은 참으로 파괴적입니다. 그 안에는 분노와 멸시의 모든 악이 함께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언어폭력은 한 인생을 쉽게 죽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가해자가 반대로 지옥 불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남들을 그런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의와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분노와 멸시, 모욕, 언어폭력 등이 살인이라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입니다. 피해자의 전인격이 죽기 때문입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하나님은 분노와 멸시와 모욕은 소위 자기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를 제거하려는 욕구를 나타내는 추한 증상이라 규정하신 것입니다. 분노하고 멸시하고 모욕을 줄 때 사람의 생각, 표정, 말에는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는, ‘그가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품고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이미 마음으로부터 악한 바람이 불고 있기에, 결국은 그것이 한 인격을 죽게 만드는 치명타가 되기에 바로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 랍비들은 제육 계명을 위반하는 경우는 살인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분노하는 자, 형제를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 또한 살인이라고 규정하셨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범죄의 범주뿐 아니라 심판의 범위도 확장하셨습니다.
누군가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 문제를 너무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분노에서 멸시를 거쳐 모독적 언어로 번지는 이 세 가지 금기를 통해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소중함과 인격의 가치를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소중함은 분명 살인을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 제대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 언어까지 절제되고,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할 때, 상대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선악 간 행동의 근원이라는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접근하고 계십니다. 우리 존재의 참모습,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도 공유하여 그분의 삶과 조화를 이루게 될 그 사랑 속으로 우리를 깊이 이끌어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차원에서 변화되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의 의미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
물론 부당하게 화내지 않는다는 계획만으로는 이웃사랑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계획을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처럼 율법은 행동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앎이 필요하고 선하고 아름답다 해도 행동의 근원인 인간의 마음에는 절대 이를 수 없습니다. 율법이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율법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갈 3:21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능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관계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의에 대한 옛 가르침과 천국의 의인 첫 번째 대비에서 분노와 멸시의 위험성이 지적된 것은 최종 단계를 향한 기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행동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예수님은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방금 명확히 말씀하신 것에 실제 적용을 제시하시기 위해 일상의 상황을 그려주셨습니다. 만일 분노와 멸시, 모욕이 너무나 심각하고 위험하다면 이미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내버려 두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조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하보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한 사람의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께 그토록 소중할진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천국의 삶에 합당한 자가 되는지를 분명히 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예를 통해 율법으로는 절대 이를 수 없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실례는 23절과 24절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에서의 상황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 있고, 한창 예배를 드리는 중인데 갑자기 형제가 우리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기억난다면, 즉시 교회를 떠나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형제를 찾아가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다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25절과 26절로 고발자와 함께 법정에 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만일 상대방에게 물적 피해를 주어 그 문제로 인해 고발자와 법정에 가야 할 상황이라면, 빨리 그와 타협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법정으로 들어가면 고발한 사람이 재판관 앞에서 고소할 것이고 재판관은 유죄를 선고하여 감옥에 갇힐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전에 송사를 화해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형제’와 관련된 상황이고, 두 번째는 고발자와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든 기본적인 상황은 똑같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도중이라도 그 불만이 기억난다면 예배드리는 일을 멈추고라도 가서 그것을 즉각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즉시 행동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 모릅니다. 살인이 끔찍한 범죄라고 한다면 악의적 분노와 모욕, 언어폭력 역시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모든 행동, 말, 표정, 혹은 생각은 분명 살인입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고 억울하게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에 대해 매우 민감해야 합니다. 소원함이 남아 있게 해서도, 그런 소원함이 자라도록 해서도 안 됩니다. 즉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즉시 깨어진 관계를 알아차리자마자 주도권을 잡고 그것을 고치고, 우리가 유발한 불만에 대해 사과하며 그 피해를 보상해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육 계명의 논리가 함축된 이러한 극히 실제적인 교훈을 끌어내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을 해하는 일을 피하고 싶다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적극적으로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면 율법의 조항을 잘 지켰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겼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계명도 지키고, 열심히 예배에 나오고, 봉사하면서도 여전히 이웃을 상하게 하고, 심령을 죽이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어처구니없는 모순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분노와 멸시, 적의의 문제를 길게 다루셨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멸시와 분노가 사라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실제 발생하는 잘못된 행동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관계 회복을 포함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 향한 온전한 모습과 함께 매일 다른 이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긴박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분노, 멸시, 적대감, 언어폭력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인내와 사랑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사랑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 예배는 의미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예배의 자리에 거룩한 광휘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의 의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것이 부정되는 자리는 참 예배의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갈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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