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9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분노하는 그리스도인? 엡 4:26-27, 30-32]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애니메이션 영화인 “인사이드 아웃”을 보셨습니까? 이 영화는 11살의 주인공 라일리를 통해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매우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어요. 라일리가 아이스하키를 타거나 행동할 때 아이의 감정 컨트롤타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감정인 기쁨, 슬픔, 버럭, 소심, 까칠 등이죠. 이 감정들이 그 안에서 라일리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이들은 라일리의 핵심 기억을 만들고, 다채로운 기억의 섬을 형성하고, 라일리를 성장시켜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인사이드 아웃”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정적 감정 또한 삶의 일부라는 걸 보게 합니다. 실은 매일 같이 사람들은 외부환경의 영향을 받는 감정선에 따라 좋았다가 어떤 때는 나빴다가 이 패턴을 반복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쁠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고, 까칠해질 수도 있고, 화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다양한 감정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우리는 참으로 황량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희로애락을 통해, 거기에 주님이 함께하셔서 우리와 같이 웃어주시고, 울어주시고, 라일리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시간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 것이죠. 시편을 보면 그런 다양한 감정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변화무쌍한 감정조차도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러나 널을 뛰는 감정의 변화는 우리에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양한 감정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면을 하나하나 지워내지 못한다면, 그것의 나쁜 기억으로부터 넘어서거나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매 순간 널뛰는 감정의 깊은 골로 인해 틈이 벌어지고, 거기에 실족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분과 노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불쏘시개 역할을 합니다. 우리 안에 악이 자라도록 불을 지피는거죠. 결국 그 악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만듭니다.
시 37:8에서 말씀합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분을 그치라,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신 감정의 영역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고 대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감정은 마귀에게 빌미를 줌으로써 그가 마음껏 뛰어노는 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특별히 우리 감정의 영역에서 분노를 콕 집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고 하셨지만, 상황에 따라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종종 공분을 산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악하고 그릇된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냥 있을 수 없어서 그 일에 대해 분노하곤 합니다. 악하고 나쁜 것을 향해서 분내지 않고 그냥 눈감아 버린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 안에서 장사하던 자들의 상을 뒤엎어버리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요 2:13-16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이 웃으면서 이 일을 하셨겠어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에서 상기된 목소리로 외치시며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르셨을 겁니다. 그러하셨듯이 세상의 불의함을 보면서 교회가 분노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나야 하는 것이죠. 시 119:53에서 시인도 불의한 세상을 향해 분노합니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예수님의 분노와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성경이 분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살다 보면 말씀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아요. 다양한 이유로 분이 일어나니까요.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오늘 말씀은 두 가지 주의점을 말씀합니다.
하나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을 내다보면 죄와 연결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요즘 뉴스를 통해 접하는 많은 사건이 사람들의 분과 연결이 됩니다. 언쟁을 높이며 싸우다가 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하면 이성을 잃어버리고 폭주하기 때문이죠. 얼마 전에도 층간소음으로 다투다가 분을 참지 못하고 윗층으로 뛰어 올라가 이웃의 생명을 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고 분을 참지 못해 부모까지도 무참하게 살해하는 일도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분은 우리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어요. 분을 내다보면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내뱉게 되면서 결국 가까운 가족(남편, 아내, 자녀)과 지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했다가 결국 실족합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은 분노해도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보다는 실은 분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을 내서 죄에게 빌미를 주지 말라는 거죠. 불일 듯 일어나는 분과 노를 제어하는 것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자멸하고, 다른 이들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우리의 분노가 상처받은 자존심, 원한, 악의, 증오, 복수심과 같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분을 내다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내가 분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의, 사랑, 온전한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겠어요?그 분노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투영될 수 있겠습니까?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가 진다는 것은 유대의 시간개념에서는 새로운 날의 시작입니다. 분을 새로운 날까지 끌고 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몇 날 며칠 분을 품고 자는데 잠이 올리 있겠어요? 그날 격한 감정이 정리되지 못하면 우리는 상한 감정에 휩싸여 점점 깊은 늪으로 빠져들 겁니다. 피폐해집니다. 그 부정의 힘이 우리를 장악해버릴 거예요. 그게 어느 순간 타인을 향해 폭발하게 되죠.
이렇게 죄와 분을 다스리지 못할 때 가장 환호성을 지르는 존재가 누구겠어요? 사탄, 마귀입니다. 분이 넘쳐나다 보면 균열이 가고, 마귀는 그 틈으로 들어와 우리 삶을 망가트립니다. 그래서 분노를 참아냄으로써 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31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마귀에게 틈을 주어 마귀가 나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31절에서는 이것들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비방하는 것 등은 옛사람의 삶을 대변하는 것들입니다. 구원받은 뒤에도 우리 안에 지긋지긋하게 붙어있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악의란 뭘까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나쁜 감정들을 지칭하는 겁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내면의 정화 없이는 옛사람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실제화될 수 없어요. 우리의 믿음은 삶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그렇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 하나하나 새로워질 때 진정성 있는 변화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분과 노를 버리도록 하기 위해 32절 말씀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연결시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노를 아십니까? 죄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무조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 죄값을 치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인거예요. 바로 그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분과 노는 다른 성정으로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리 잡아야 합니다. 자기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마음이어야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이 지점을 향해 우리가 성장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았듯이 또한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라고 하나님은 생각하시는 거예요. 여기까지 가도록 성령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견인해주십니다. 성도로서 성장과 변화는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힘과 척도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성령님이 아니십니다. 이끄시는 성령님 앞에서 고집 피우고자 하는 우리가 문제이죠. 버티는 나의 고집으로 인해 진정성 있는 변화가 따라오지 않으면 성도의 견인을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이 근심하시는 겁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엡 4:30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님이 근심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사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성령님은 선택받고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증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치심을 통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딸이다” 라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와 함께 성령님은 마지막 날까지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성령님을 거부하거나 근심하시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서운 일입니다. 사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지 않기 위해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거기에서 성령의 열매가 무르익어가는 삶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분과 노는 성령의 열매로 이기고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과 노를 성령 안에서 다스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의를 결코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우리의 우선적 가치인데 이룰 수 없다면 너무나도 큰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로서 우리는 매일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편에, 예수 그리스도 편에, 인도하시는 성령님 편에 날마다 서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를 견인하시는 성령님의 역동적인 힘을 의지하십시오. 자기 힘으로 하려 하지 마십시오. 실패할 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변화무쌍한 감정의 영역에서 진정성 있는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은혜와 평강이 넘칠 것입니다. 우리 옆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진정 흘러갈 것입니다.
분과 노를 멈추면 샬롬이 임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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