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6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하나님은 나의 롤모델? 엡 5장 1-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누구에게나 본받고 싶은 롤모델 한 명쯤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롤모델이란 단어는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과 닮으려는 경향과 한 개인과 대상 사이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심리적으로 일치시키려는 행위가 합쳐진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을 모델링하다가 이것이 발전되면서 역할 모델을 찾게 되고, 더 나아가 그 사람를 멘토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과정은 한 사람을 성숙한 인간으로 개발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진전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죠.
사람들이 좋아하는 롤모델은 역사를 빛낸 위인일 수도 있고,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 혹은 성공한 사업가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의 영향으로 배우 윤여정 씨가 연령층을 불문하고 많은 이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롤모델인 이들의 삶, 언행, 철학과 가치관, 성과 등을 본받고 싶어 하고 닮아가고자 노력합니다. 심지어 범죄자들까지도 자기의 롤모델이 있어 극악한 범죄를 모방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경우에는 세상의 지명도 높은 인물보다는 성경의 인물 중에서 자신의 롤모델로 삼기도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베드로, 바울 등 각자의 성격에 따라 닮고 싶은 인물을 선택하고 따라가고자 합니다. 바울 같은 경우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정도로 신앙적인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여러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특정한 이를 신앙인의 온전한 롤모델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롤모델은 실은 이 땅에 없습니다. 이 땅의 인간 중 어느 누구도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이 될 수 없어서입니다. 이번에 이혼을 발표한 빌 게이츠를 보십시오. 많은 이들의 롤모델이었던 그가 갑작스럽게 이미지가 추락하고 있어요.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이시라고 증거합니다.
엡 5장 1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여기에서 “그러므로”는 엡 4장 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말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이 32절의 말씀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평생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음을 자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모든 생각, 모든 행실, 모든 행동의 영역에 걸쳐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다는 것이죠.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심지어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견고한 프레임에 갇혀 있는 우리를 위해 그 견고한 프레임을 깨부수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음을 우리 가슴이 느끼면, 하나님의 사랑이 냉냉했던 우리 마음속으로 밀려 들어와 우리를 뜨겁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사랑을 받는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면접에서 면접관이 본받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을 때 아버지라고 답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건 의례적인 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닮은 얼굴뿐 아니라 전인적으로 진정 닮고 싶은 겁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자녀는 아버지를 참으로 사랑하고, 닮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억지로 이루어지거나 의무적인 수행이 아닙니다. 기쁨이고 열망입니다.
이 땅의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도 이럴진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우리들의 열망은 달라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사랑을 받은 자녀라는 의미는 그냥 일상에서 오가는 사랑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헌신적 사랑으로 인해 아버지와 자녀의 인격적 관계로 묶여있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새로운 혈연관계를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갖고 사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여기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내 삶에 실제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랑의 수준이 표피적인 것이라면, 그 관계 또한 표피적인 관계에 그친다는 겁니다. 그와 같은 수준이라면 본받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자기 생각대로 자기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려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옛사람의 경계와 새 사람의 경계를 나누는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기독교 메시지의 중요한 많은 부분을 놓치고 말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관계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영적 각성이 일어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됩니다. 기독교를 자기들에게 부과된 도덕률 정도로만 생각하는 이들과는 결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 그렇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씀은 참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목표이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버거운 무게에 쉽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싱크로율 100%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씀의 실천은 완성이 없습니다. 이만하면 됐지 하는 순간 실족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바울의 심정으로 이 길을 가고 싶어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우리의 진행 방향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는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중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부족하다고 해서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끝까지 가야 합니다.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은 그렇게 수없이 옆길로 빠져나가는 많은 순례자를 보여줍니다. 쉬운 길로 가라고 하는 수많은 유혹 앞에 무너지고 마는 거죠. 우리가 말씀 앞에 서 있는 중에도 마귀는 속삭입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을 본받기는커녕, 정말 잘 가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일어도 멈추지 말고, 그냥 바울처럼 꾸준히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푯대는 명확해야겠지요. 그렇게 가면서 조금씩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하나님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할 수 있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방식으로, 즉 그 분이 갖고 계신 능력과 권세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허를 찌르는 사랑이었습니다. 사탄은 그 분의 아가페 사랑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데 있어서 이 사랑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한 뒤에 2절에서 그 사랑의 실천을 보이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행할 수 있을까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배반은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자신이 불리해지면 쉽게 돌아서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감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무시하고 있고 여전히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인식 정도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이 사랑을 얼마나 나타내느냐로 측정이 됩니다. 아는 것만큼만 삶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실천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레 11:44b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거룩을 닮으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앞에 우리도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일에 순종하려면 우리는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거룩, 그 분의 용서가 우리 삶에 스며들어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역사가 되도록 몸부림쳐야만 합니다. 설렁설렁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어서입니다. 그러나 걱정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본받고자 열망하는 우리를 성령님께서 돕고 계십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 강림을 통해 제자들은 그렇게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본받아 살아가고자 힘썼습니다. 겁 없이 나아가 하나님의 대행자로 섰습니다. 세상은 그런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그림을 찾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하늘의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삶의 보람을 얻습니다.
놀라운 변화,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함이 있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답게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가는, 그래서 세상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 자녀 됨을 분명하게 삶으로 보여주어 하나님의 얼굴이 되어 살아가는 자녀 되십시오.
여러분 그 삶이 축복입니다. 우리의 기쁨입니다.
'설교동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무엇에 취해 살고 있는가? 행 2장 4-13절 (0) | 2021.05.31 |
---|---|
변화의 원동력, 성령님!! 행 2장 1-4절 (0) | 2021.05.23 |
분노하는 그리스도인? 엡 4:26-27, 30-32 (0) | 2021.05.09 |
당신의 말에 진정성이 있습니까? 엡 4장 25-29절 (0) | 2021.05.02 |
증인과 표적: 막 16장 15-20절 (0) | 2021.04.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