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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10-12절

by 최수근 2021. 12. 12.

2021년 12월 12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10-1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21세기에도 여전히 기독교는 세계 곳곳에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 박해 국가 감시단체인 오픈도어스 USA에 따르면 지난 한 해에만 세계적으로 약 34,000만 명의 기독교인이 핍박과 차별을 당하였고, 이 중에 4,761명은 기독교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되었고, 4,488개에 달하는 교회가 테러 공격을 받는 등 심각한 핍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타 문화 또는 타 종교와의 이념 갈등, 혹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희생입니다.

이 같은 박해가 우리에겐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만일 이렇게 급박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삶에 핍박이 일상이 된다면, 누가 믿으려 할까요? 아마도 예수를 믿는 목적 자체가 마음의 평안과 복 받는 일, 사후 준비 정도에 머문다면 당장 어떤 불이익이 닥쳐올 때, 믿음을 쉽게 저버릴 겁니다. 그러나 여전히 21세기에도 자신의 믿음 때문에 박해를 감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박해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우선하려고 하는 모든 안일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믿는 자로서 고난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9-13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 때에 당할 환난을 경고하셨고, 요한복음 1518-19절에선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와 함께 빌립보서 129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말씀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고난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아무리 온유하고 평화를 이루려 한다 해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 때문에 가치충돌도 일어나게 되고, 언제든 어떻게든 세상은 우리를 압박해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박해란 목숨을 잃거나 교회가 불태워지거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부딪치게 되는 자그마한 불편함, 언어폭력, 부당한 대우일 수 있습니다. 나의 믿음으로 인해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타협점을 찾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내가 받는 고난을 견디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믿음의 삶에 분명 고난이 있다고 하셨는데, 지금 여러분의 삶은 평안하십니까? 평안하게 보내고 있다면 왜 그렇게 평안한지 생각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에 우리는 평안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무유기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우리 안에 영혼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치와 상반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밀어내고 소외시키고 따돌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핍박은 두렵고 피해야 할 일이 아니라 복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박해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는 일반적인 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입니다. 511절 말씀을 근거로 하면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 받는 모든 핍박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은 이들이 복되다 하셨지만, 종종 박해에 대해 오해가 있곤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영적 오해와 무지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을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꼭두새벽부터 교회에 가서 남편이 출근하는 것도, 아이들이 등교하는 것도 챙겨주지 못한다면 당장 불신자 남편에게서 공격이 들어올 것입니다. 주중에 아내 혼자 갓난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는데 남편이 주일 아침 교회에 가 예배와 봉사, 교제할 것을 다 하고 저녁 늦게 들어오면 아내가 웃으면서 맞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가정을 도외시 하고 생활신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나의 부주의와 안일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압박감을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예수님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곤란함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고 이를 예수님은 복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언제고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행동하고자 할 때 세상이 어떻게 돌변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꺼립니다. 예수님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완강히 거부합니다.

기독교는 출발부터 박해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박해 앞에서 초대교회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복음은 수리아 지역을 거쳐 유럽으로 번져갔습니다. 로마제국에서도 황제가 아닌 예수님에게 충성한다는 이유로 긴 시간의 박해가 있었지만, 박해를 견뎌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서, 굶주린 사자의 포효함 앞에서, 길거리에 줄지어 세워진 십자가 형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했습니다. 세상이 보면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박해가 가해지면 기독교인들이 줄어들어야 하지만 믿는 이들의 수가 점점 더해 갔습습니다.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늘의 보물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닌,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았고, 그 생명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박해를 받던 교회가 국가 종교로 공인되고, 중세교회에 들어서면서 교권과 세상 권력이 손을 잡고, 교회가 거꾸로 세상을 박해하는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이교도들을 처참하게 처형했고,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이들이 무고히 희생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핍박을 받는 곳이지 예수님 때문에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곳이 결코 아닌데도 자신들의 교권 확립을 위해 그와 같은 억압의 정치를 자행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자 하는 이들, 말씀을 자기들의 언어로 읽고자 하는 이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상실하면서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저들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있지 못하는 순간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교회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건 세상의 박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단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코로나 팬데믹의 깊은 늪에 빠져 있습니다. 연일 6, 7천 명을 오가면서 사람들은 확진자가 나올 때마다 교회발 코로나 운운하면서 마치 교회가 코로나의 온상이며 확산시키는 통로처럼 보도하기도 합니다. “교회에도 방역패스를 시행해야 한다.” “예배 인원을 제한해야 한다” “교회 문을 닫아야 한다는 등 야단법석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어떤 이들은 코로나를 빙자해서 예배를 못 드리게 해 교회가 탄압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면에 그런 깊은 뜻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논리로 이야기하면, 이 땅의 자영업자들은 모두 박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코로나 방역이 강화되면서 이들의 영업이 제한받고, 수입이 줄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결코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비난과 압박이 아닙니다. 교회의 안일함과 공공성을 상실한 결과가 아닐까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회에 협력을 잘하고, 봉사에 앞장서고, 사회정의구현을 위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거룩한 삶을 산다고 해도 이 세상이 우리를 칭송할 그런 세상은 아닙니다. 국가적으로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아 그리스도인들을 드러내놓고 박해하고 죽이기도 하지만 많은 나라에선 헌법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심각한 박해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외침 자체를 보면 결국은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잣대로 유대인들의 죄를 들추어내었을 때 유대인들이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을 던졌던 것처럼 세상도 그런 상황에서는 교회를 향해 돌을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아우르고 달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존속을 위해 적당히 에둘러서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께 충성함으로 세상의 가치에 반대편에 서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당연한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을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넘어설 것을 명령하십니다. 11-12a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우리를 모략하며 악한 말을 한다고 해도 마음 상해하거나 힘들어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무기력, 나의 실수, 나의 죄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받는 어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복이 있어서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렵고 힘들 때 그 고난 자체를, 그 문제 자체를 너무 깊이 묵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늘어나는 것은 깊은 한숨뿐입니다. 자괴감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감정과 이성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영적인 지성에 귀를 기울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의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의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엄청난 박해에 직면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후서 3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말씀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타협하지 않는 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자세는 두려워하거나 울상 짓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였고, 감사하였습니다. 슬쩍 절 한번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지킨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불꽃 속에서 지켜주셨고, 그들을 공격했던 사람들 앞에서도 존귀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18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도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무엇보다도 전혀 누구도 이 믿음의 길에서 박해받지 않았다면, 그래서 새로운 길이라면 그 길을 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지난 2000년간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았지만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뿌려놓은 희생의 길에서 더욱 담대하게 신앙의 길을 타협하지 않고 걸어가야 합니다. 타협하며 오히려 어줍잖은 신앙을 향해 세상이 돌을 던집니다. 우리가 바로 서 있으면, 우리에게 주의 권능이 있으면 세상은 감히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이 분명해집니다. 이기지 못하고 무심한 체, 자신의 믿음을 내려놓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큰 불행입니다. 수많은 은혜의 선물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를 위해 박해받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진실되게 살아가고자 할 때 가치 상충으로 세상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심각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욥이 당했던 고난들처럼 참으로 이유 없어 보이는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면서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그와 같이 원치 않았던 결과 때문에 신앙의 길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바라는 바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끝까지 나아가십시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나아가십시오.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차꼬에 차여 찬송을 부를 때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어졌습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억압의 틀이 일순간에 열려지고, 상황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우리들의 동기와 행위, 일과 언어, 사상 등 삶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을 맨 앞에 모시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부름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가기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복을 갈망합니다. 이율배반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신 길에 기꺼이 들어선다면 우리에게 복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복된 삶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지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축복은 불투명한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분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 갖는 표지입니다. 이 표지를 우리들 서로에게서 발견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서로 공유하는 예수생명교회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명분뿐인 신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신앙의 삶을 오늘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시다. 이것이 주께로 향하는 옳은 길이고, 이 길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이 길에 서 있는 자들이야말로 복된 자라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참 제자라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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