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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 마 5장 17-20절

by 최수근 2022. 1. 14.

2022년 1월 9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예수님517-2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지난 2년간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은 세계의 많은 교회를 위축시켰습니다. 선교지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쭉 성장해오던 한국교회도 성장세가 꺾여 우려되고 있던 차에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로 더욱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이에 새로운 시대에 교회를 염려하는 많은 이들이 해법을 찾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교단도 교회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다가 올해 주제를 복음으로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하자고 결의하여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위축되고 있는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는다면 올바른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거의 안에 있습니다.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안을 살펴보려면 먼저 우리가 그동안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교회의 소중한 유산과 가치가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아울러 잘못된 유산을 움켜쥐고 있다면 그 손을 펴고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적들을 잃어버릴 때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상실합니다. 왜곡과 상실은 타성에 젖어 들 때 나타납니다. 그와 함께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적용할 때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늘 개혁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교회개혁은 말씀의 본래 가치, 말씀에 따른 올바른 행동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가치와 목적을 보여주는 길라잡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을 기반으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이 먼저 들어와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 배경으로 성경 배우기에 힘썼던 한국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과연 성경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을까요? 말씀의 본질은 희미해지고 비본질적인 것이 한국교회를 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유대교의 핵심 세력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관습과 유전에 집착하고 다른 유형의 가치들이 우선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그들의 편리대로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을 살리는 일에 매진하기보다는 비본질적인 종교적 규제 강화에 열을 올렸고, 형식에 얽매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단지 종교 권력의 강화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사이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자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 살리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신 예수님을 공격한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완악한 유대교 사회를 향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와 함께 예수님은 율법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멍에와 종교권력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에게 외치셨습니다.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형식으로 옭아매고 그 멍에로 힘들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안과 안식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평안은 간데없고, 삶이 무겁고 신앙의 길에서 힘이 든다면 하나님이 지어주신 짐이라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멍에를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율법을 폐하고자 하는 반율법적인 교사로 보았습니다. 본래 율법의 목적과 가치를 잃어버린 그들의 눈에 비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율법을 파괴하는 행동으로 보였던 겁니다. 그런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바로 이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바로 그 약속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 목적에서 예수님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신앙혁명이 정말로 이스라엘이 믿고 기다려 온 모든 것의 성취임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선언하는 새로운 방식에 따라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죽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그 삶을 따르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 매우 혁명적인 제안을 하셨습니다. 본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들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퇴색되고 오염된 말씀의 본래 가치와 의미들을 끄집어내신 것뿐입니다. 그것이 기록된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그 점에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 안에는 구약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뒤 수십 년 후에 마르시온 이라는 이단이 교회사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마귀의 작품이며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많은 사람이 구약성경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약과 비교해 양도 많고 어렵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읽는 구약의 범위는 매우 한정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구약의 완성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하심 없이, 구속사의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오랜 세월을 하나님은 구속사를 위해 준비하셨고, 그 마지막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대로 오셔서 자신의 인격과 가르침과 역사를 통해 이와 같은 율법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율법 해석의 표준이 되셨고, 율법을 통해 주시려 했던 하나님의 의도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정한 형벌을 그의 거룩한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범하고 그의 거룩한 율법을 깨뜨린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판결이 내려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6:23a “죄의 삯은 사망이요.” 예수님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 하나는 죄의 형벌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까닭이 이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율법이 성취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처럼 죄의 형벌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처벌하심에서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 자기 아들의 성스럽고 점 없고 흠 없는 몸에 죄를 벌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하늘에 자기를 바치심으로 율법의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폐기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께서 일점일획이란 표현을 쓴 것은 구약 율법 가운데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로서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신 겁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이 다 중요하며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율법에 대해 차등화시키는 생각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율법은 신실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절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 시대에 적용되는 책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영원한 계시의 말씀이어서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이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말씀 중심의 삶이 요청됩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14:21a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은혜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결도 일종의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로 율법을 사랑하며 이 율법을 지키도록 갈망하는 새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자기 경험과 관습에 뿌리내린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부정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가 말씀에 뿌리내린 삶인지 또는 아닌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이라고 하셨을 때 이 대상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원리에 부합하게 가르치지 못했고,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한 율법과 중요하지 않은 율법으로 나누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 말씀보다도 장로들의 유전을 우선시하였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소위 율법의 주석서입니다. 잘해보자고 시작된 것이 점점 말씀의 본질을 비켜나 해석에 해석, 적용과 적용을 하다가 본래 율법의 의도와는 점점 멀어졌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이 율법의 수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실제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차이가 없다고 하셨어요. 형제에 대하여 욕하거나 수치를 안겨주는 것은 작은 것이므로 무시해도 되고, 살인하는 것은 큰 범죄이므로 죄라고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형제와 동료와 이웃에게 분노하고 욕하는 것이 살인과 마찬가지인 큰 죄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또 하나님과 화해하는 제사법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하는 것만큼 심각한 죄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고, 간음을 하는 것만 나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부터 간음하는 것만큼 중한 범죄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안에 더러움은 정녕 씻어내지 못하고 거룩한 척 하나님 앞에 서서 열심히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열심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당장 자신들을 종교지도자, 스승이라고 으스대고 있지만,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대접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만, 그들은 결코 큰 자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자일 수밖에 없고,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그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고 하셨습니다. 5:19b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결국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자로서 크다 또는 작다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진정 그 말씀을 온전하게 행동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생각과 마음으로서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본래 율법의 스피릿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셨기에 불법을 행하는 자를 모르신다고 하셨습니다. 7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기에 신앙과 대립하는 자기의 의가 아닌 신앙의 표식으로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는 의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보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 점에서 실패하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형식적인 준수에 충실하던 자들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것으로 백성을 재판하던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실제 생활화하려 노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율법의 참 정신은 잊어버리고 오직 형식에만 매달려 그것을 준수하기에 급급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율법에서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버렸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자기의 의를 내세웠던 것이고, 실상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와 같은 자기의 의로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과는 다른 의를 힘입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는 자기를 과시하는 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이와 같은 자기 의를 넘어서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다한다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넘어설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그럴듯한 논리와 편의에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을 제한하거나 왜곡하지 말고, 순전하게 말씀을 행하고, 가르침으로서 말씀이 온전히 우리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들의 의보다 우리를 낫게 하는 것은 내 열심, 내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서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하며, 신앙과 행함이 일치하는 의, 나아가 자기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채워지고, 그 의가 바탕이 되어서 우리의 행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나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세상의 그런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니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안타깝게도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빛과 소금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구별되게 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아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은 우리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는 하나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의 새 시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믿고 살아가는 제자들로서 새로운 세상에 속하고 싶다면 단지 종교적인 거룩함에 매어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언약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시고, 그 변화를 통해 이 땅에서의 행동이 바뀌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거룩한 삶을 통해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 중심의 삶을 겸손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그 반대편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기 열심만 갖고 살아가다가는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 나라를 상실하는 비극을 맞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가 어디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오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26-7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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